6장(4~5) 교착 1628~30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24.
4. 토지 반환령
막시밀리안의 아이디어:
그 전해에 카톨릭 군주(= 막시밀리안)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수십 년 동안 교회가 빼앗긴 토지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주장했어.
막시밀리안은 그의 동생이 이미 뮌스터, 리에주,
헬디스하임, 파더보른, 퀼른의 주교구들을 차지했는데도 사촌에게 오스나브뤼크를 주고 싶어했지.
(-_-;;; 이런 뻔뻔한 도둑놈 가트니라구.)
처음에 황제는 토지 반환의 결과와 막시밀리안의
권력 확장이 두려워 그 주장을 묵살했지만 발렌슈타인의 힘이 커지자 그의 태도도 점차 변했어.
그는 토지반환령을 적절히 집행하면 합스부르크 권력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어.
1628년 후반 페르디난트가 대내 정책에서
그 구상을 앞세우자 카톨릭 군주들은 오히려 주춤했어.
그 무렵 교황이 황제 대신 막시밀리안을 교회의 옹호자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그런데 경쟁자인 황제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고
막시밀리안에게 가장 불리한 순간에 토지반환령을 내새운 거야.
페르디난트는 막시밀리안의 계획을 가로챈 거지.
페르디난트의 토지 반환령 집행:
황제는 우선 1555년 이후 신교 측에 부당하게 편입된 모든 교회령을 원래대로 복원하려 했지.
제국의회에서 이 조치를 가결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황제의 칙령으로 집행할 작정이었어.
신교도 축출과 아울러 황제의 통치권을 시험한다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지.
시작은 마그데부르크 주교구였어.
실행된다면 세속 재산으로 부를 얻은 군주들이
한순간에 하급 귀족으로 전락할 수 있었고 제국 전역의 경계선을 모두 바꾸는 혁명에 가까운 집행이었어.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는 불안에 떨었어.
페르디난트는 원래 동맹의 대가로 요한에게
작센 영토를 보장했지만 이제 동맹이 필요 없으니 약속도 필요 없게 된 거지.
또한 보헤미아의 루터파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던 약속도 물거품이 됐어.
(-_-;;; 아놔;; 이 망할놈의 황제 자식이!)
자유시들의 처지는 더 위험했어.
독일 최대의 루터파 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는
1555년 당시 카톨릭 주교구의 핵심이었다가 16세기 후반에 개종했던 도시였어.
그 밖에도 신교로 개종한 다수의 도시는 어떻게 될까?
그 동안 세대에 걸쳐 법적으로 인정받아온
재산권이 훼손되고, 귀족이 자신의 영지에서, 시민이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날 거야.
'군주의 종교는 곧 나라의 종교'라는 원칙이
교회에 귀속된 지역에서 강제로 관철된다면
많은 이가 고통을 겪고,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모든 상업 활동이 중단되겠지.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향후 관리해야 할
영토의 넓이에 비해 카톨릭 세력이 크지 않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어.
보헤미아에서도 영지를 관리할 카톨릭 영주와 카톨릭 사제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
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 주교구는 엘베강 일대에서 가장 넓은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어.
시민들은 대부분 루터파였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당시에는 카톨릭 주교구였지.
대성당과 교회들은 오래전에 신교 세력에게 빼앗겼고,
주교구는 신교 행정관의 수중에 넘어갔어.
마그데부르크의 신교 행정관이었던 크리스티안 빌헬름은 덴마크 왕이 침략했을 때 동맹을 맺었어.
(크리스티안 빌헬름이라... 이 놈의 동명이인들-ㅠ-;;)
이를 빌미 삼아 발렌슈타인이 진군해오자 주교구를 떠나야 했던 그는 스웨덴 왕에게 도움을 청했지.
남겨진 신하들은 작센 선제후의 아들을 그의 직위에
앉혀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이미 황제가 주교직을 자신의 막내 아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한 뒤였어.
이 극악스런 상황에 막시밀리안과 작센의 요한은
급하게 그 하나마나한 제국의회라도 소집해보려 했어.
하지만 황제는 제국의회를 소집해 치유하기에는
교회의 상처가 너무 크다며 1629년 3월 6일 무방비 상태의 독일에 토지반환령을 반포했다.
대단히 가혹한 명령이었어.
칼뱅파의 합법성이 부인되었고, 교회 토지에 대한 신교도의 매입 권리가 부인되었지.
이 때문에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를 정당하게 취득한 사람도 피해를 입었어.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 토지와 관련된 이전의 법적 판결이 일체 부인된 것이었지.
이 칙령의 결과로 대부분의 토지가 임자가 바뀌게 된
슈바벤과 프랑켄 같은 행정구에서 제기한 항의를 묵살해버렸어.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것은 요한의 입헌주의에 바탕을 둔 기다란 항의서였어.
물론 길고 난해한 답신으로 대응했지. -_-;;;;;;;;;
막시밀리안만은 달래 보려고 레오폴트 대공이
베르덴과 민덴 교구들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다른 모든 군주들의 재산권이 박살 난 상황에서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
(몰매 맞아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당연하겠지;;;)
결국 황제는 칼로써(발렌슈타인의 칼로써) 관철시키는 노골적인 수단을 택했어.
황제는 발렌슈타인에게는 새로 군대를
모집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의 군대는 확대는 물론
향후 무제한으로 병력을 충원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하는 명령을 반포했어.
이렇게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신민들의 약점을 이용해 착실히 권력을 다졌어.
팜플랫과 선전문 유행가에서 일제히 황제를 비난하고 조롱했으나 현실적 저항은 전혀 없었어.
아우크스부르크시는 루터파에게는 거의 성지였지.
마그데부르크는 자유시가 아니라 주교구였지만 아우크스부르크는 전혀 달랐어.
자유시의 권리가 이렇게 함부로 침해된 적은 없었어.
그러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어.
이를 시금석으로 삼아 자유시의 힘을 시험하고, 신교 반대 세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 알 수 있을 거야.
1629년 8월 8일 아우크스부르크 시 역시 신교 신앙이 전면 금지되고, 신교 목사들이 도시에서 추방됐어.
아우크스부르크는 칼을 뽑거나 총을 쏘는 일도 없이 무너졌어.
8천명의 시민들이 추방되었지.
신교도들은 격분했지만 아무도 떨쳐 일어나지 않았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가 예의 그 고상한 항의 편지를 쓴 게 고작이었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용기도 없었고, 독일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p311
5. 오라녜공 프레드리크 헨드리크
페르디난트는 제군 내에서는 카를 5세 이후 가장 강력한 황제였어.
그 권력을 적절히 사용했다면, 군주권이 제한되고
합스부르크의 절대주의와 카톨릭교회가 지배하는 통합 독일 국가의 기반을 구축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제국 밖에서 폭풍이 그를 향해 불어닥쳤어.
네덜란드:
만토바와 저지대 지방으로 모여든 폭풍은 스웨덴에서 북부로 들어왔어.
그 배후의 원인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불화였지.
황제는 이미 에스파냐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어.
펠리페 4세는 재정적으로 제국 정책의 주인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담스러웠고 위험했지.
그는 독일의 군사력을 이탈리아에 투입했고,
카톨릭 동맹체의 황제를 교황과 다투도록 했으며,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몰고 갔어.
마침내 에스파냐의 공세에 두려움을 느낀
리슐리외과 폴란드, 스웨덴가 강화를 맺자 신흥 카톨릭 제국에 대립하는 대규모 신교 세력이 성립됐어.
만토바 전쟁:
출발은 만토바 전쟁이었어.
에스파냐로부터 암시를 받은 페르디난트가
만토바 공국을 접수하자 합스부르크가 이탈리아에 개입할까 싶어 교황이 펄쩍 뛰었어.
고해 신부의 충고에 재빨리 물러났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어.
(-_-;; 욕심도 많고 경솔하기까지 하네;;)
에스파냐가 만토바 공국을 더 거세게 몰아치라고
압박하자 페르디난트는 어쩔 수 없이 제국군을 이탈리아로 보냈어.
교황은 개빡쳐서 그에게 복원된 교구의 주교 임명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지.
만토바의 위기는 그 자체로는 큰 사건이 아니었지만 30년 전쟁의 전환점이 됐어.
이를 계기로 카톨릭 교회는 분열을 자초했고,
교황과 합스부르크 왕조는 불화를 빚었지.
또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카톨릭 세력과 신교 세력의 동맹이 도덕적으로 용인됐어.
1629년은 현실보다 이론의 측면에서 더 파란만장했대.
전장이 아니라 대사관에서 새로운 사태가 전개된 거야.
에스파냐는 황제를 교황 반대파로 끌고 갔을 뿐 아니라
저지대에 관한 이해관계 때문에 황제가 구축한 제국의 힘을 네덜란드 전쟁에 헛되이 투입하도록 몰아갔어.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네덜란드에서는, 별로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주도면밀한 지휘관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프리데리크 헨드리크가 책임자로 나섰어.
1629년 8월 19일 독일 국경의 요새 베젤을 점령했고, 한 달 뒤 헤르토겐보슈를 손에 넣었어.
이 때문에 이사벨 대공비의 통치도 인기를 잃었지.
한편 네덜란드 함선이 영국해협에 몰려들어 에스파냐의 금이 플랑드르로 운송되는 통로를 차단했어.
급료를 못 받은 에스파냐 병사들은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고 보병의 규율도 무너졌어.
백성들에게 특별세를 거뒀으나 비상대책에 불과했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건 페르디난트 뿐이었어.
에스파냐의 압박의 결과:
에스파냐 정부는 이 모든 책임은 제국의 평화를 깬 네덜란드에 있다고 주장했어.
그들이 베젤에서 국경을 넘은 탓에 독일 군주들이 그에 대항하면서 재앙이 일어났다는 거지.
에스파냐가 페르디난트에게 가한 압력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지.
첫째, 독일에서 페르디난트의 노력이 분산됐어.
한편으로는 독일 군주들에게 아들을 선출해달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나서도록 강압해야했어.
둘째,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일찍 발렌슈타인을 희생시켜야했지.
발렌슈타인의 꿈:
그는 엘베강을 중심으로 북부 해안과, 동쪽과 남쪽의 영토를 아우르는 독일-슬라브 제국을 꿈꿨어.
그래서 브란덴브루크와 작센이 필요했고
폴란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조공국으로 만들고 덴마크와 스웨덴을 무릎 꿇릴 작정이었어.
그런 뒤 후속 정책으로 투르크를 공격할 참이었지.
동유럽 태생으로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처음 전쟁을 경험한 발렌슈타인은 투르크를 최대의 숙적으로 여겼어.
따라서 발렌슈타인에게 당장 급한 일은 북독일을 진정시키는 거였어.
사실 덴마크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북부 군주들은 이미 그에게 정치적으로 복속 됐어.
그래서 토지반환령의 집행에 반기를 들었지.
일찍부터 그는 황제에게 에스파냐의 도움을 거부하고
발트 함대의 구축과 운영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으나 양측 모두 함대를 마련하지 못한 채 저항만 불렀지 -_-;;
그의 판단보다 발트 항구들의 대항이 강력했던 거야.
이제는 스웨덴:
1629년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브란덴부르크와
슈트랄준트에서부터 필라우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폴란드는 항전을 포기했고 그 덕분에 독일을 침략할 수 있게 됐어.
1629년 2 월스웨덴왕은 덴마크 왕과 만났어.
바로 강화를 맺었다면 좋았겠지만 크리스티안4세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았어.
하지만 그 연극 같은 행동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에게 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속으로 5년 전만해도 스웨덴 왕이
이렇듯 강력하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자제력으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p317
이 만남에 발렌슈타인은 폴란드에 증원군을
보내고 스웨덴군을 묶어 두려고 덴마크 왕에게 완화된 강하 조건을 제시했어.
크리스티안은 북독일 주교구들을 포기해야 하는 여전히 그지같은 조건이었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어.
1629년 6월 뤼베크에서 독일과 덴마크 사이에 강화가 맺어졌지.
그 해 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발렌슈타인에게 등을 돌리고 네덜란드와 스웨덴 왕에게 손을 내밀었어.
프랑스와 영국의 대리인들이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에 휴전을 주선해줬지.
이런 상황에서 발렌슈타인은 군대를 증강시켜
북독일에 확실히 안착하는 것 밖에 대책이 없었어.
본인만의 발트 계획을 완성하려 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에스파냐와의 다툼은 불가피해졌지.
1629년 초 리슐리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수사를 점령하고, 카살레를 해방시키고, 사보이, 베네치아, 교황과 조약을 체결했어.
올리바레스가 위그노를 지원해 그의 후방을 공격했으나 내부 위험을 잠재우고 알레 강화를 맺었지.
이탈리아 침공은 중단된 게 아니라 연기되었어.
스피놀라는 전쟁이 아니라 조약을 권고했으나
호전적은 올리바레스는 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어.
오히려 스피놀라를 깎아내리려 애쓰며 스피놀라 대신 발렌슈타인을 보내달라고 했어. -_-;;;
남은 적은 보잘것 없는 스웨덴 왕뿐인데 발트 지역에 대군이 있을 필요가 있겠냐면서.
...페르디난트는 그냥 따랐어.
1630년 5월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이탈리아로 보내라고 지시했고 발렌슈타인은 보낼 수 없다고 버텼어.
5월 29일... 스웨덴 왕은 스톡홀름에서 배에 올랐어.
그는 리슐리외에게는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막시밀리안에게는 '신교의 구세주'였어.
하지만 페르디난트에게는 문명권의 극지에 위치한 동토의 하찮은 찬탈자에 불과했지.
그래도 발렌타인의 판단은 황제보다 괜찮았지.
스웨덴군의 상륙 자체를 막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어.
만약 그가 북부 해안을 완전히 방비할 수 있었다면 실제로 스웨덴군의 상륙은 불가능했을 거야.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발렌슈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읏 탓에 그의 3만 병력은 이탈리아로 향했어.
지 밖에 모르는 페르디난트:
발렌슈타인인의 힘은 위축되고 있었어.
그가 세습 토지를 차지해 버려서 황실 재원은
더욱 줄어들었고 제국 각지에서 그의 가렴주구 때문에 황제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었지.
이러니 황제의 신하들도 등을 돌리는 건 당연했어.
더 심각한 것은 격분한 막시밀리안의 위험이었지.
그는 뮌헨에서 프랑스 사절에게 황제를 무장해제시키려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어.
1630년여름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선제후단 회의가 열리게 됐어.
페르디난트는 5월 말에 그곳으로 출발했지.
이제 발렌슈타인을 희생시켜 아들의 제위 계승을 이루려던 계획을 단행할 때가 온 거야.
에스파냐 친척들은 요구사항 하나를 또 덧붙였어.
선제후들에게서 네덜란드 파병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야 했던 거야.
에스파냐는 페르디난트에게 서로 정책을 합치자고
강요했지만 프랑스를 독일 무대에서 활개치게 내버려둔 탓이 실패했어.
분열된 군주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페르디난트밖에 없었지만,
그는 에스파냐 친척들에게 시달리느라
리슐리외 연합 세력을 상대할 수 없었다.
1630년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독일 전쟁의 에필로그가 아니라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갈등을 알리는 프롤로그였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의 정책은 은근슬쩍 폐지되어버렸다.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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