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 철수 30년 만에 독일 땅에 평화가 깃들었어. 사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조항들은 13년 전 프라하에서 결정된 조항들보다 나을 게 없었어. 게다가 전쟁속에서 태어나 전쟁이 유일한 밥벌이였던 병사들은 혼란스러워 하기도 했지. 뮌스터에서 막판에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군대를 1년 더 주둔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야. 프랑스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 에스파냐와 여전히 전쟁 중인 데다 자국 군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사정이 달랐지. 해산을 앞둔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 외에는 살 길이 없는 독일인 병사들이 있었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와 보헤미아,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소수의 신교도 병사들은 목숨을 바친 정부가 강화를 체결하느라 자신들의 처지..
4. 끝날 때는 더욱 타오르는 얀카우 전투: 회의가 시작된 1644년 12월부터 1645년11월 까지 1년 동안 황제의 군사적 상황은 더 나빠졌어. 1645년 2월 넷째 주에 토르스텐손은 프라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어. 타보르에서 15km 떨어진 얀카우에 이르러서야 제국군과 바이에른의 연합군이 그를 저지하고 전투로 유도했지. 스웨덴군과 제국군은 각각 행군하는 동안 여러 지역 마을을 불태움. 토르스텐손이 기선 제압. 메르시와 베르트가 이끄는 바이에른 기병대와 하츠펠트가 지휘하는 제국의 예비군이 뒤늦게 달려왔으나 참패. 얀카우 전투(Battle of Jankau) 진영 스웨덴 (승리) 제국군 지휘관 토르스텐손 비텐베르크 외 2명 하츠펠트 베르트 괴첸 병력 16,000명 대포 60문 16,000명..
1. 평화를 위한 첫걸음 페르디난트는 힘들어: 로크루아 전투 후 5주가 지난 1643년 6월 23일 페르디난트 3세는 프랑스, 스웨덴과의 협상을 재가했어. 하지만 뮌스터에서의 강화 회의는 12월 4일에 열렸어.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는 베스트팔렌 지역 지연된 원인은 세가지였어. ① 황제와 독일 군주들간의 다툼. ② 프랑스가 약화되고 네덜란드 연방과 사이가 틀어진 것. ③ 스웨덴과 덴마크의 불화. 황제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제국대표자회의를 수락하면서 제국 내의 어려움, 특히 종교적 평화의 문제가 외부의 간섭 없이 타결되기를 바랐어. 각 세력들은 저마다의 동맹자를 구하겠지만 그래도 독일 회의로 독일 쟁점을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 하지만 오랜 전쟁에서 이해관계가 엉망진창이 됐잖아. 더 많이 잃은 자와 완..
3. 다시 스웨덴 함부르크에서 황제와 스웨덴, 프랑스 대리인들은 평화 회담의 준비 작업에 착수했어. 페르디난트는 세 명의 대사를 연속으로 보냈으나 스웨덴, 프랑스를 납득시키지 못했어. 프랑스 측이 유리했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합스부르크가 더 불리해 질 터였지. 서로의 욕심에 충분하지 않은 조건 때문에 지연이 이루어지면서 서로 상대방이 타결을 미룬다며 맹렬히 비난했어. 덴만크가 중재한다고 나서서 문제만 커졌지. 제국 정부가 낙관할만한 사소한 일도 있기는 했어. 제국의회가 끝난 직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이 죽자 계승자들은 스웨덴을 버리고 황제와 강화를 맺었어. 이로써 헤센-카셀 의 빌헬름과 추방된 팔츠 선제후만이 공개적인 반란 세력으로 남게 되었어. (신교 동맹 1세대들은 다 주겄네 -0-..
1. 펠리페4세 올리바레스와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는 브라이자흐가 함락된 책임을 페르난도에게 물었어. -_-;; 올리바레스는 터무니없게도 브라이자흐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해야 했다고 주장했어. 재정적 지원은 축소된 데다 에스파냐로부터 끊임없이 모순적인 명령이 하달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 왕과 총신은 오로지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데만 선수였어. 에스파냐 펠리페4세: (나이 먹고 아프다니까 초상화 갱신 -_-;) 펠르페 2세 시절에도 이따금씩 제가되던 공공의 불만은 펠리페 3세의 소음으로 커졌고 4세의 치하에는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어. 게다가 통화를 서툴게 관리한 탓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어. 이 무렵 에스파냐로 오는 물자의 대부분은 네덜란드 선박들이 운송을 담당했어. ..
4. 스웨덴은 그냥 죽지 않아 비트슈토크 전투: 페르디난트2세는 스웨덴이 중흥 직전에 죽었어. 당시 스웨덴은 부활의 정점에 오르기 직전이었으니, 그는 자신의 모든 희망이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난 셈이었어. (-_-;; 아... 어쩜 사망 시기도 이렇게 얄미울까?) 제국군은 브란덴부르크로 파견되어 젝센군과 함께 바르네를 상대했어. 그러나 바르네는 유능한 동포 토르스텐손,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교 레슬리와 킹의 도움을 받아 형세를 역전시켰어. 그는 교묘한 작전으로 하벨 강의 지류인 도세 강변의 비트슈토크에서 적의 연합군을 차단했지. 1636년 10월 4일 제국군 언덕 위에 자리 잡고, 땅을 파서 포대 설치, 마차들을 주변에 방책처럼 두름. 바네르의 계획: 제국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몰아내고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