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4~6) 라인 쟁탈전 1635~39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27.
4. 스웨덴은 그냥 죽지 않아
비트슈토크 전투:
페르디난트2세는 스웨덴이 중흥 직전에 죽었어.
당시 스웨덴은 부활의 정점에 오르기 직전이었으니,
그는 자신의 모든 희망이 꺾이는 것을 눈으로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난 셈이었어.
(-_-;; 아... 어쩜 사망 시기도 이렇게 얄미울까?)
제국군은 브란덴부르크로 파견되어 젝센군과 함께 바르네를 상대했어.
그러나 바르네는 유능한 동포 토르스텐손,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교 레슬리와 킹의 도움을 받아 형세를 역전시켰어.
그는 교묘한 작전으로 하벨 강의 지류인 도세 강변의 비트슈토크에서 적의 연합군을 차단했지.
1636년 10월 4일
제국군 언덕 위에 자리 잡고, 땅을 파서 포대 설치, 마차들을 주변에 방책처럼 두름.
바네르의 계획:
제국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몰아내고 평원에서 포위.
그와 토르스텐손은 기병대의 절반을 거느리고 언덕 아래 사면으로 가서 적의 공격을 유도.
레슬리와 킹은 남은 절반의 기병대와 함께 숲을 관통해 적의 측면과 후위 기습.
실전:
바네르가 시선을 끄는데는 성공했으나 중과부적.
레슬리의 후위공격이 늦음.
이 상황에서 적을 언덕에서 몰아내지 못함.
킹이 길을 잃어 많이 늦음.
그러나 킹 도착 후 전세가 삽시간에 역전.
위험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함.
비트슈토크 전투 (Battle of Wittsto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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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 |||
스웨덴 (승리) | 제국군 작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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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요한 바네르 레나르트 토르텐손 알렉산더 레슬리 제임스 킹 |
그라프 폰 하츠펠트 존 조지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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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17,000명 | 18,000명 | ||
전사 및 부상 | |||
3,500명 | 2,000명 사망 3,000명 포로 |
바네르의 계획은 모험적인 군사 전술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했어.
예전 보단 못해도 스웨덴군의 명예를 찾아주었지.
더 직접적인 효과는 작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무능한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크 빌헬름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는 점이야.
이후 스웨덴 군은 브란덴부르크를 속히 탈환했으며
1637년 5월 토르가우 부근의 국경까지 진출해 작센마저 위협했어.
라이프치히는 거의 정복했고, 서쪽에서는 스웨덴군의 전위가 튀링겐으로 들어가 에르푸르트를 점령했어.
스웨덴의 군사력이 부활한 데는 스톡홀름 정부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옥센셰르나는
독일의 통제권을 리슐리외에게 넘기고
스웨덴으로 돌아가 정부를 확고히 장악하기로 했어.
태후의 무능한 섭정으로 감금 당하며 광대쇼나 보고 있던 공주는 바보가 될 뻔했어. -_-;;;
게다가 덴마크 왕자랑 결혼시키려 했었지.
옥센셰르나는 크리스티나를 결혼과 감금으로 모두 해방시켰어.
그가 스톡홀름의 권력을 다시 장악하자
스웨덴 장군들은 비상시나 평상시에 병력과 자금의 지원을 확신할 수 있었어.
이를 바탕으로 스웨덴군은 덴마크의 공격으로부터 북독일과 발트해를 굳게 지켰지.
네덜란드 브레다 함락:
스웨덴의 진출은 저지대 지방에서의 두드러진 성공으로 이어졌어.
1637년 10월 10일, 오랫동안 포위되어 있던 브레다가 마침내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에게 함락되었지.
12년 동안 에스파냐의 수중에 있던 브레다가 함락되자
브라반트 국경이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페르난도에게는 처음으로 중대한 제동이 걸렸어.
12년 전 오라녜 공 마우리츠가 그랬듯이 그는 그곳을 구하지 못한 탓에 불신을 샀어.
이제 라인에 대한 압력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라인펠덴 전투:
라인에 대한 압력이 해소되자 베른하르트는
프랑스 정부의 끈덕진 요구에 따라 마침내 방어 태세를 접고 강을 건넜어.
1638년 2월초 바젤에서 라인펠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중요한 다리를 공략했어.
공격 날짜는 3월 1일로 정해졌으나,
그전에 이탈리아 용병 사벨리와 베르트가 이끄는 제국군이 슈바르츠발트에서 빠르게 다가왔어.
첫째 날:
제킹겐에서 우안으로 접근하던 사벨리의 전위가 베른하르트의 군대에게 참패.
사벨리는 본대로 후퇴.
이후 구릉과 숲이 있는 지역으로 우회.
이 휴식기에 베른하르트가 나룻배로 포병과 기병 일부를 좌안에서 수송.
그는 수송 병력으로 교두보를 방어하고, 사벨리가 도시를 구하지 못하도록 저지.
사벨리가 베른하르트의 좌측을 공격해 성공.전장의 맞은편에서는 베른하르트의 우익이 제국군 좌익을 격퇴.
두 전투의 결과 양측 군대의 축이 뒤바뀜.기회를 잡은 사벨리가 베른하르트와 다리 사이로 진격.
날이 저물 무렵 양측 병력의 위치가 뒤바뀜.
베른하르트에게 불리.
라인 강 좌안에서 본대와 차단, 사벨리에게 다리와 라인펠덴을 내준 상황.
라우펜부르크 방면으로 이동, 라인 강을 건너 병력을 재규합한 후 라인펠덴으로 다시 진군.
둘째 날:
3월 3일 아침 7시경
와해된 줄 알았던 베른하르트 군이 진군하는 것을 본 사벨리 병사들이 놀라서 도망.
베른하르트가 경야포 몇 문을 노획.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모인 사벨리 병력에 세차례 발포.
베른하르트가 최후의 공세를 취하기도 전에 적진은 동요, 이내 일거에 무너짐 -_-????
(다시 올 걸 예상 못했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
베른하르트의 기병대가 추격.
제국군은 절반이 도망치고 절반이 항복.
사벨리, 베르트 체포.
라인펠덴 전투 (Battle of Rheinfel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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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 |||
프랑스 (승리) 바이마르군 |
제국군 바이에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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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베른하르트 | 페데리코 사벨리 요한 폰 베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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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6,000명 | 7,000명 | ||
전사 및 부상 | |||
1,968명 | 500명 사망 3,000명 포로 |
전투 후 베른하르트의 군대는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브라이자흐를 사방에서 포위했어.
리슐리외:
리슐리외의 성공은
베른하르트와 스웨덴을 어떻게 통제하고
그들의 독자적인 행동에 어떻게 통합성을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었어.
베른하르트가 드디어 진면모를 보여주는 동안 새로운 스웨덴의 문제와 씨름해야 했어.
조약의 시효가 거의 만료되자 옥센셰르나는 동맹에서 빠지기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거든.
예전에는 동맹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늘 위험하기도 했으므로 이제는 동맹에서 빠져 자체적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거였어.
결과적으로 마침내 스웨덴은 강화의 의도를 버리고 프랑스와 동맹을 함부르크 조약으로 쇄신했지.
적의 동맹 세력을 하나씩 분리하려 했던 페르디난트의 계획은 실패했어.
1638년 6월 5일 베른하르트가 브라이자흐에 등장했어.
합스부르크 전략의 요충지를 차지할 기회라고 보고
리슐리외는 증원군을 보낼 준비를 했어.
바이에른 장군 괴첸은 구원하러 서둘러 달려갔다가 7월 30일 비텐바이어에서 참패를 당했지.
엿새 뒤 베른하르트는 튀렌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합류했어.
8월 중순 도시가 완전히 포위되었고,
10월 로렌의 샤를은 황제의 사주를 받아
지원하러 오던 중 젠하임에서 베른하르트의 기습을 받고 차단되어 전멸했어. -_-;;
1638년 12월 17일 처참한 굶주림으로 버티고 있었던 브라이자흐가 항복했어.
라인의 요처이자 독일의 관문인 브라이자흐가 함락되자, 프랑스는 알자스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지.
페르디난트 3세:
동쪽에서 바네르는 켐니츠 부근에서
작센의 요한을 물리치고, 피르나를 점령하고,
브란다이스 주둔군을 격파하고 보헤미아를 침략했어.
페르난도는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의 침략을 제지하지 못한 탓에 독일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이 무렵 페르디난트에게는 재대로 된 인재가 남아있지 않았어.
신임 황제는 부족한 자금과 무능한 장군들로
거센 밀물을 막으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피콜로미니는 저지대 지방으로 갔고,
아르님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베르트는 프랑스에 포로로 잡혔다.
페르디난트는 그들의 자리를 다른 인물들이
메워주기를 기대했지만 전부 실망만 안겨주었다.
갈라스는 해가 갈 수록 열정을 잃고
무능력한 주정뱅이가 되어갔다.
...
적의 편에서 넘어온 괴첸은
그저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베르트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p519
병력 충원에 필요한 인구가 참담할 정도로 감소하고,
세금을 거둬야 할 세습 토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군대의 급료와 식량이 크게 부족한 현실은 페르디난트에게 점점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어.
그러나 1639년 봄,
라인 일대에 갑자기 위기가 발생해 리슐리외가 전진을 멈추자 행동방침을 결정할 여유가 생겼어.
베른하르트가 프랑스 왕에게 반기를 든 거야.
1635년에 맺은 조약에 의해 그는 알자스를 보유할 권리를 얻었잖아.
자신의 군대가 장악했으므로 자신에게 완전히 양도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요구했어.
또한 브라이자흐가 프랑스 왕에게 항복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항복한 것이므로 그곳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어.
독일 땅은 독일 군주에게 귀속되어야 하며,
자신은 스웨덴과 동등한 조건에서 동맹으로 대우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어.
5. 안녕... 베른하르트
안녕히 베른하르트:
30년 전쟁의 내노라할만한 마지막 용병 대장이었던 그의 시대도 끝이 났어.
만스펠트는 하게나우를 원했고,
발렌슈타인은 메클렌부르크, 라인팔츠령,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를 원했다.
스웨덴 장군들은 토지를 요구했고,
베른하르트는 프랑켄과 알자스를 차지했다.
일단 개인적 야심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후대 역사에서 알자스가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베른하르트의 성과는 특히 빛난다.
그에 비해 만스펠트와 스웨덴 장군들의 성과는 지극히 초라했고,
발렌슈타인만 어느 정도 베른하르트에 필적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p520
베른하르트가 애국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브라이자흐가 함락된 뒤 몇 달 동안
리슐리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려내면서,
알자스의 무조건 양도를 요구하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의 태도는 위선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실효는 없었어.
그는 제국 내에 세력을 구축하려 하지도 않았고,
영향력 있는 지배자들에게 공감을 끌어내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야.
오히려 그는 그에 앞서 독일 세력을 결성하려 했던 헤센 방백의 계획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지.
뭐... 진심에 관해서는 추측할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어쨌거나 프랑스는 난감하게 됐는데 운명의 여신이 프랑스의 손을 들어줬지.
불과 일주일 만에 위협적인 라이벌 베른하르트는 안타까운 영웅 베른하르트가 되어버렸어.
몇 달 전부터 이따금씩 열병에 시달렸던 그는
7월 중순 갑자기 병이 악화되면서 며칠만에 사망했어.
6년 전 구스타프가 죽었을 때도 그랬듯이 베른하르트의 죽음은 리슐리외에게 큰 행운이었어.
그는 흥분제를 받아 목숨을 연장하며 유언장을 구술로 작성했대.
그는 알자스를 자기 형에게 맡겼으나
바이마르의 빌헬름에게 그렇게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형이 알자스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프랑스 왕에게 넘기라고 말했다.
...
군대는 그가 늘 신뢰했던 스위스 귀족 출신의 부사령관 에를라흐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
유언장에 드러난 그의 견해는 결국 신교 대의를
수호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리슐리외 하나뿐이고,
베른하르트나 알자스나 자신의 군대를 물려줄 만한 독일 세력은 없다는 것이었다.
p522
베른하르트의 삶은 나무랄데 없었다.
그는 냉철하고 고결했으며, 사적인 허물도 없었다.
공적인 책임을 볼 때 그가 라인란트를 짓발고,
란츠후트를 파괴하고, 바이에른을 불태웠으나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임 황제 페르디난트가 원해서 제국을 잿더미로 만들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종교적 대의로 정당화되었다.
베른하르트가 어떤 야심을 가졌든,
페르디난트가 카톨릭이었던 것처럼 그는 독실한 신교도였다.
"주님이시여, 제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그는 마지막 숨을 억지로 내쉬며 속삭였다.
아직 서른 다섯의 창창한 나이였다.
p523
6. 프리드리히의 DNA란...
팔츠의 카를 루트비히:
베른하르트의 병사들의 현재 주인은 에를라흐였어.
그러므로 누구든 에를라흐와 협상하면 오버라인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하지만 독일 군주들 중 협상을 시도한 건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 아들인 카를 루트비히 뿐이었어.
(근데;;; 루이스가 왜 루트비히임??)
팔츠 선제후 카를 루트비히는 고집에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성실하며, 일찍부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스물세 살의 젊은이였어.
인간 혐오증에 가까운 그의 성정은
이 시기에 젊음의 무모한 낙관론으로 다소 완화되었대.
그가 베른하르트가 남긴 군대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오버라인도 차지했어.
카를 루트비히는 신교의 대의,
아버지의 잘못, 자신의 확실한 독일계 혈통,
그에 따른 독일 군주의 계승권을 적절히 활용하고,
부유한 외삼촌 영국 왕 찰스 1세에게서 자금을 얻어내
베른하르트의 군대에서 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군대는 리슐리외가 우려할 만큼
큰 큐모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출발하면서 그는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직선로를 행로로 택했다.
리슐리외는 물랭에서 습격해 뱅센에서 그를 포로로 잡았다.
그는 에를라흐가 군대를 루이 13세에게 팔아넘길 때까지 그곳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p524
베른하르트가 독일의 것이라고 생각한
영토와 군대를 프랑스로 안 넘기려고 해서 영웅이라면
그걸 홀랑 다 넘겨 버린 에를라흐는 최악의 반역자일 거야.
그러나 베른하르트가 단지 야심찬 용병 지도자에 불과하다면, 에를라흐도 딱 그 정도의 인물이겠지.
그는 단지 자신이 급료를 주고,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새 주인을 알선해주었을 뿐이기 때문이지.
베른하르트 군대가 프랑스에 넘어간 책임을 묻는다면
에를라흐가 아니라 그에게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은 독일 군주들에게 물어야 하겠지.
그는 나름대로 최선의 대안을 찾았고, 그 대안이 리슐리외였어.
1639년 10월 9일 프랑스 왕과 이후 바이마르군(혹은 베른하르트군)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어.
급료는 계속 프랑스 정부가 담당하고,
라인 일대에서 프랑스의 지휘를 따르기로 했고 독립성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지.
브라이자흐를 포함한 일부 요새들은 프랑스 왕권하에 보유할수도 있었어.
그 조약은 베른하르트가 죽은 뒤
독일 애국자들이 동맹자들의 전쟁에 대한
공평하고 공정한 통제를 완전히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베른하르트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가 살아있을 때는 적어도 독일 사령관으로서
리슐리외나 옥센셰르나가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랬던 그가 죽고,
그의 군대가 외국의 통제를 받게 되자,
전쟁은 이제 프랑스 왕과 에스파냐 왕이 독일 땅에서 싸우는 양상으로 전락했다.
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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