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3~4) 에스파냐의 몰락 1639~43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29.
3. 다시 스웨덴
함부르크에서 황제와 스웨덴, 프랑스 대리인들은 평화 회담의 준비 작업에 착수했어.
페르디난트는 세 명의 대사를 연속으로
보냈으나 스웨덴, 프랑스를 납득시키지 못했어.
프랑스 측이 유리했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합스부르크가 더 불리해 질 터였지.
서로의 욕심에 충분하지 않은 조건 때문에
지연이 이루어지면서 서로 상대방이 타결을 미룬다며 맹렬히 비난했어.
덴만크가 중재한다고 나서서 문제만 커졌지.
제국 정부가 낙관할만한 사소한 일도 있기는 했어.
제국의회가 끝난 직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이 죽자 계승자들은 스웨덴을 버리고 황제와 강화를 맺었어.
이로써 헤센-카셀 의 빌헬름과 추방된 팔츠 선제후만이 공개적인 반란 세력으로 남게 되었어.
(신교 동맹 1세대들은 다 주겄네 -0-;;;)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의 관계에도 문제가 있었어.
스웨덴의 젊은 여왕은 선제후와의 결혼을 내켜하지 않은 데다 포메른의 소유권도 말썽의 근원이었지.
황제가 스웨덴의 완벽한 소외를 기대할만한 근거는 충분했어.
바네르의 야망:
스웨덴 측의 갈등은 베른하르트가 죽은 2년동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어.
바네르는 전통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카를 9세의 치세에 반란을 일으켜 목숨을 잃었어.
군대 사령관이었던 그 역시 독일 땅에 욕심이 많았어.
만스펠트나 발렌슈타인, 베른하르트 같은
사람들의 경력은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무관심할 수 없는 가능성을 열어줬어.
(-_-;;;어쨌거나 진취적인 3대장)
바네르는 탐욕스럽고, 오만했지만 호른 군대가 궤멸된 후 위치가 강고해졌지.
몇 년 동안 그래도 바네르는 북독일에서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보루였어.
그는 스웨덴과 라인 혹은 중부 독일의 연락선을 방어하고 있었거든.
당시 그는 병사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고 급료와 보급 문제는 사태를 점점 극단으로 치닫게 했지.
그러나 옥센셰르나에게는 어영부영 자기 변명식으로 적당히 과장을 섞어 보고했어.
옥센셰르나에게 바네르는 리슐리외의 베른하르트 같은 존재가 되었대.
1639년 보헤미아를 침공했고 피콜로미니에게 패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네르는 기회를 잘 활용했지.
이 때 제국 영토와 작위를 주겠다는 제안에 넘어갔어.
그나마 그걸 스웨덴한테 들켰네 -_-;;;
복안?이 들통나 잠시 타격을 입었지만
1640년 다시 원정에 나서 에르푸르트로 진격해 프랑스 군이 지휘하는 베른하르트 군과 합류했어.
여기서 바네르는 발렌슈타인의 예를 쫓아 레오폴트 대공과 협상했지.
그리고는 바이에른 군대를 지휘했지. -_-;;;
또한 뻔뻔스럽게도 다시 베른하르트군을 매수해 그 군대를 자기 휘하에 두려고 했어.
시도는 실패했고 바네르는 베저 강변으로 물러났어.
적극적이었지만 영리하지 못했던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탐닉했던 술의 힘에 넘어가고 말았어.
특히 그는 1640년 6월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지.
(-_-;;; 또 엘리자벳이야? 동명이인의 제국이야;;)
그녀는 남편의 원정에 대부분 참여했으며
남편보다 훨씬 나은 인물로 남편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병사들도 존경했어.
그리고 아내의 장례식에서 바덴 변경백의 어린 딸 요한 마르가레타를 눈여겨 보았지.
극심한 비탄?에 빠진 상태에서 그녀에게 즉각
강렬한 애정을 품었고 결혼은 물의를 빚을 만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어.
이제 바덴 변경백의 사위가 된 바네르는
제국 내에서 원하면 스웨덴 왕실에 반기를 들 수도 있는 강력한 위치에 올랐지.
또한 그는 독일 군주들 사이에 당당히 낄 수 있는 신분이 되었어.
바네르의 행동은 지극히 개인적 야망에 휘둘렸어.
어쨌든 걸핏하면 다툼을 일으키는 그는 동맹자로서 별로 쓸모가 없었지.
베른하르트군과 합류 한 후 게브리앙과
격한 불화를 빚은 탓에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어.
바네르는 1641년 1월 말 작센의 츠비카우로 철수했다가 할버슈타트로 갔어.
그리고 5월에 사망했지 -_-;;;
적극성과 나태함이 교차되면서 결정적 공격을 회피하는
그의 행동은 출세주의 군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베른하르트군을 매수하려 한 끝에
결국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처럼 바네르도
자신의 군대를 오판했다.
그는 한 번도 인기를 누린 적이 없었고,
첫 아내가 죽은 뒤 진실한 통합의 구심점도 잃었다.
그가 점차 군대의 규율은 물론이고 급료와 보급품에
신경을 쓰지 않자 군대는 반란의 분위기로 치달았다.
폭동이 터지기 전에 그는 1641년 5월 20일 할버슈타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정부는 그가 남긴 최악의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p550
토르스텐손:
바네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옥센셰르나는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을 후임으로 임명했어.
그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휘하에서 경력을 쌓은 군인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어.
그는 11월 중순 병사들이 막 반란을 일으키고 위협을 하고 있는 순간 도착했지.
토르스텐손은 엄격하고 당당한 인물이었어.
통풍을 심하게 앓았으나, 브랑겔의 암울한 보고에도
다리를 저는 자신의 질병에도 기가 꺾이지 않았어.
그는 스웨덴 병사 7천명과 각고의 노력으로 자금도 마련해서 가져왔어.
자금을 적절히 분배하고 스웨덴 병사들을 충원해
군대에 힘을 넣고 반란 병사들에게 위압적이지 않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한 덕분에 드디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지.
그는 요한 바네르보다 더 신뢰할 만한 지도자였어.
왕실에 대한 충성심도 컸고, 조직 능력도 더 뛰어났지.
그는 자금 부족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대처했어.
병력을 충원할 때 급료를 지급하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었어.
병력의 항구적인 공급처인 가난한 농민들에게
그는 급료 대신 식량과 의복, 무기를 제공하고, 약탈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이 방법 덕분에 그는 고참 병사들에게만 급료를 지불하면 됐어.
토르스텐손은 인기에 구애받지도 추구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병사들은 그를 싫어했고, 그는 그들을 엄격한 공포로 다스렸지.
더구나 그는 지병인 통풍 때문에 들것을 타고 다니며 군대를 지휘했어.
그가 유능하지 않았다면 또 반란이 일어났을 거야.
그러나 그는 병사들에게 약탈 기회와 승리를 안겨줬지.
병사들은 그의 교수형과 총살형, 매질에 욕설을 퍼부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어.
토르스텐손의 부임은 황제의 희망을 짓밟았어.
1642년 봄, 그는 제국의 영토로 곧장 쳐들어갔지.
작센군은 슈바이트니츠에서 참패를 당했고
모라비아를 침공해서 약탈 할 것이 없는 그 도시를 약탈했고, 올로모츠는 6월에 함락됐어.
그의 정찰대가 빈에서 40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자
제국의 장군들과 레오폴트 대공,
피콜로미는 대군을 모아 반격에 나섰다.
그는 군대의 주력군을 거느리고 슐레지엔을 거쳐 작센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장이 형편없는 요한 게오르크를 굴복시키고 제국군이 오기를 기다릴 참이었다.
그가 라이프치히를 포위했을 무력,
1642년 11월 2일 레오폴트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토르스텐손은 북쪽의 브라이텐펠트 방면으로 철수했다.
추격에 나선 레오폴트는 섣부르게
뇌르틀링겐 전투를 꿈꾸었으나,
결과는 또 한 번의 브라이텐펠트 전투였다 -_-;;
p553
브라이텐펠트 전투:
레오폴트군이 스웨덴군에게 폭격.
이 때 신무기인 연쇄탄 사용.
토르스텐손은 정예 병력과 교전할 준비가 안 된 것을 알고 포화 속에서 좌익 공격.
그러자 레오폴트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짐.
전장의 반대편에서 제국 기병대가 스웨덴군 격파.
보병대는 스웨덴군의 중앙을 압박
하지만 승리한 토르스텐손의 우익 기병대가 제국군을 분산시킨 뒤 중앙군을 지원.
제국군의 보병대 물리침.
이후 토르스텐손은 전 병력으로 고립된 제국군 우익 기병대 포위.
대다수의 제국군 도망.
레오폴트가 도망병들을 불러 모았으나 아무도 대공말을 안 들음 -_-;;;
스웨덴군이 도망간 제국군 추격 후 항복.
브라이텐펠트(Battle of Breitenfeld) |
|||
진영 | |||
스웨덴 (승리) | 제국군 | ||
지휘관 | |||
토르스텐손 비텐베르크 외 2명 |
레오폴트 빌헬름 피콜로미니 외3명 |
||
병력 | |||
20,000명 | 26,000명 | ||
전사 및 부상 | |||
2,000명 사망 2,000명 부상 |
3~5,000명 사망 또는 부상 5,000명 포로 |
몇 주일 뒤 제국의 반대편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졌어.
8년 전 호엔트빌 성을 제국에 양도하지 않겠다고
버텼던 신교도 비더홀트가 프랑스를 위해 콘스탄츠
북쪽 해안의 위베를링겐 시를 습격해 점령했다는 소식이었어.
그 와중에 막시밀리안은 또 프랑스측으로 기울었다.
플랑드르:
가문의 분열은 페르디난트의 저항력을 약하시켰어.
올리바레스는 페르난도의 자리에 처음에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을 후계자로 정했지.
펠리페4세는 처음에는 그 제안을 환영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꿔 자신의 아들 후안 호세를 총독으로 임명했어.
어머니는 배우였고 호세는 이제 겨우 열 두살이었지.
국민들은 서자를 왕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당연히 분노했어.
항의가 잇따르지 마침내 펠리페는 후안 호세를
총독으로 파견하는 것을 무기한 연기하고, 당분간 프란시스코 데 멜로를 네덜란드 섭정으로 임명했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왕가는 그토록 오래 동맹을 맺었으면서도,
에스파냐 왕이 빈의 에스파냐 세력을 이끄는
공인된 지도자로 나이도 더 많은 레폴트 대공보다
서자를 선호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리하여 펠리페의 어리석은 오만으로 도덕적 유대개 깨졌다.
더욱이 멜로의 무능함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마지막 재앙으로 몰고 갔으며,
황제에게는 침몰하는 에스파냐 왕국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_-;;
p556
4. 안녕히 리슐리외, 안녕히 루이 13세
프랑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은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프랑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됐어.
리슐리외의 어려움은 언제나 군대에 있었지.
위험이 가장 큰 독일에 최정예 병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늘 피레네,플랑드르, 부르고뉴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귀족들을 믿지 못했어.
그래도 청년이었던 앙갱 공작 루이는 신뢰했어.
리슐리외의 제안으로 1642년 겨울 플랑드르 국경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었지.
사실 다른 이들이 신뢰하는 인물은 아니었어.
앙갱 공작은 사납고 변덕스러운 성질에 때로는 무모한 측면도 가진 유년 시절을 보냈대.
스물 두 살의 그는 그런 결함들을 많이 극복했지만,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하고 다른 사람의 반대를 몹시 싫어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어.
프랑스군도 그 무렵 많이 변했어.
리슐리외는 돈을 절약하고, 지휘관,
특히 귀족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의 규모보다 기술적 측면에 더 집중했어.
그는 왕의 지원을 얻어 규율을 더 엄격하게 집행했어.
나아가 그는 권력이 아니라 재능에 의한
승진의 길을 닦음으로써 농민, 기술자, 상점 주인,
곤궁한 귀족의 아들도 야심과 지성을 가졌다면 충분히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줬어.
이리하여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병사들은 고도로 훈련이 되었고 포위전의 기술과 인내력이 크게 향상됐어.
그래서 적의 편에서 넘어온 탈영병이나 포로가 섞여도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았지.
그 덕분에 과거에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민족의식이 발달했다.
안녕히... 리슐리외:
리슐리외는 자신의 마지막 중요한 임명이 성공해 오랜 정치적 작업이 완성되지 못하고 죽었어.
1642년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위험한 최후의 지뢰가 폭발한 해였어.
왕이 아끼는 총신 생 마르가 반란을 일으켰고 귀족 몇 명이 함께 거사했지.
리슐리외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보다 3주일밖에 더 살지 못했어.
1642년 11월 28일 그는 중병에 걸려 나흘 뒤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어.
오랫동안 꾸준히 악화 되어온 병에 시달렸던 그의 육신은 마침내 완전히 고갈됐어.
왕은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고 문병을 와서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았지.
12월 4일 정오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파리 시민들은 슬픔보다
호기심으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 리슐리외는
늘 인기가 없었으나 언제나 존경을 받았고,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국가가 위기를 맞아 언제든 의지하고 신뢰했던 사람이었다.
p558
이듬해 봄 앙갱 공작은 두 사령관 오피탈과 가시옹과 플랑드르 국경에서 작전을 개시했어.
하지만 루이 13세가 중병에 걸렸다는 진단 때문에 분위기는 어수선했지.
리슐리외의 정책은 마자랭 추기경이 계승했지만
왕이 죽고 나면 겨우 다섯 살 짜리 소년이 왕위를 계승하고 어머니가 섭정을 맡게 될 터였어.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파리의 권력자,
귀족, 시민들이 마자랭의 지도를 감내하겠지만,
그 취약한 장벽이 무너질 경우 그들이 에스파냐의 왕비와 이탈리아 추기경의 지배를 용인할 가능성은 적었지.
안녕히... 루이13세:
리슐리외 사망 후 겨우 5개월 뒤.
1643년 5월 15일 루이 13세 역시 사망했어.
임종을 앞두고 왕은 짧은 잠에서 깨어나
곁에 있는 콩데에게 말했다.
"콩데 공, 당신의 아들이 대승을 거두는 꿈을 꾸었소"
1643년 5월 15일 이른 아침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p559
로크루아 전투:
17일 밤 앙갱 공작은 오베르통과 리뮈니 사이, 뫼즈 강 서쪽의 평야 지역에서 이 소식을 들었어.
군대가 공황에 빠질까 봐 알리지 않았지.
로크루아는 주변 지역 보다 높은 지대.
로크루아와 루미니 사이에는 편평하고 땅에 모래가 섞인 관목숲과 좁은 늪지가 있음.
도시 앞은 탁 트인 공간이었고 멀리 숲이 있음.
멜로는 앙갱과 도시 사이에 기병 8천 명과 보병 1만 8천 명 배치.
앙갱의 작전은 짐과 대포를 남겨두고 좁은 숲 골짜기를 관통해 로크루아로 진군하는 것.
5월 18일 첫번째 전투:
앙갱의 첫 번째 작전은 성공적으로 전개.
멜로는 프랑스군이 손쉽게 좁은 골짜기를 지나 트인 공간으로 나오도록 그냥 둠.
프랑스군 전체를 포위해 섬멸 계획.
병력 숫자가 더 많고 스피놀라의 전통을 계승한
에스파냐 보병의 정예 병력을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
그러나 앙갱의 군대를 보자 당황.
앙갱은 중앙과 양익을 이루어 행군하는
보병대의 움직임을 기병대의 움직임으로 반쯤 가려 놓아서 병력 숫자 숨김.
정찰에도 문제가 있어 정보전에서 멜로가 실패함.
저녁 6시 앙갱은 에스파냐 대포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평원에 병력을 모음.
센테르가 갑자기 명령을 받지 않고 에스파냐군을 우회해 로크루아를 구하러 감.
센테르는 왼쪽 측면을 에스파냐 군에게 노출 시킨 채 늪지 횡단.
이 기회를 잡아 멜로가 공격하려 했으나
마침 앙갱이 지원군을 거느리고 현장 도착.
센테르에게 귀환 명령, 퇴각 엄호.
5월 19일 두 번째 전투:
동이 트자 앙갱은 사이에 있는 숲으로 진출, 총병들 소탕
이 장벽이 제거된 줄 몰랏던 알부르케가 측면의 가시옹, 정면의 앙갱과 동시에 교전.
이 교전에서 알부르케 참패.
가시옹이 알부르케 도망병들 추격.
좌익에서 오피탈이 공격, 멜로에게 반격받음.
예비군이 지원했으나 여전히 프랑스 좌익의 위기.
사태를 파악한 앙갱이 기병들을 모아 다소 무모하게 에스파냐의 중앙으로 쳐들어감.
중앙을 밀어 붙인 후 멜로의 후위에 이르러 센테르와 오피탈 부대 구함.
멜로의 기병대는 양측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오른쪽 늪으로 도망.
8천 명 가량 많은 에스파냐의 보병대가 솟은 고지에서 버팀.
이들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명 프랑스가 패배.
그러나 추격병들이 모두 다시 합류해 에스파냐 보병대 사방에서 포위.
에스파냐 사령관인 퐁텐이 우연한 총격에 마자 전사.
에스파냐 보병대 지위관이 휴전 신호.
앙갱은도 휴전을 받아들일 생각으로 몇개 중대를 거느리고 언덕을 올라감.
그런데 에스파냐 군이 그들이 공격한다고 오해하고 사격.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군들이 일제히 진격.
지도자에 대한 공격에 성난 병사들이 에스파냐군을 도륙.
브라이텐펠트(Battle of Breitenfeld) |
|||
진영 | |||
프랑스 (승리) | 에스파냐 | ||
지휘관 | |||
콩데 공작 루이2세 (앙갱 공작 루이) |
프랑시스코 데 멜로 외 1명 |
||
병력 | |||
23,000명 | 27,000명 | ||
전사 및 부상 | |||
4,000명 사망 및 부상 | 7,000명 사망 또는 부상 8,000명 포로 |
그것은 에스파냐군의 최후였다.
기병대는 살아남았으나 규율과 사기가 무너진 데다,
에스파냐군의 강점인 보병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ㅜ.ㅜ 으어 스피놀라 어뜩해)
로크루아에서 에스파냐군은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만큼
명성을 크게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명성과 목숨을 바꿔야 했다.
고참병들은 죽었고, 전통은 사라졌으며,
새 세대를 육성할 지휘관은 남아있지 않았다.
로크루아 앞의 전장에는 오늘날 작은 현대식 기념물이 서 있다.
이 소박한 회색 비석은 에스파냐군의 묘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웅장했던 엣으파냐 왕국 자체의 묘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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