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6~7) 교착 1628~30년

6. 전쟁의 여파

여전히 멀고 먼 평화:

1630 여름에는 독일에서 전쟁이 없었어.

덴마크 왕이 철수하자 신교의 마지막 무장도 끝났지.

선제후단이 남은 중대사들을 타결하고, 군대를 해산해 평화를 확립하기에 알맞은 때였어.

 

10년간의 전쟁으로 제국의 절반 이상

군대의 점령이나 통과로 그 후유증이 심각했지.

소가 병들고, 사람도 동물도 모두 죽고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어.

 

사람들의 궁핍에도 아랑곳없이 병사들은 여전히 수탈과 악행에 여념이 없었어.

(이건 전쟁 2년차부터 계속 그랬던 듯 -"-)

 

독일이 복구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어.

하지만 1630년의 군주나 권력자는 가장 빠른 그 해결책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지.

 

작센의 요한은 페르디난트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가 거의 피바다로 변했다며 강력히 항의했어.

(-_-;;; 편지는 이제 고만 보내도 될 거 가튼뒈;;)

나 요한, 편지쓰기만은 제국 일인자지!

그는 레겐스부르크에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안나부르크에서 만나 항의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어.

 

막시밀리안은 발렌슈타인을 꺾으려는 각오에서

교황과 리슐리외의 비밀 지원을 등에 업고 레겐스부르크에 갔기에 어떤 면에서 더 나빴지.

 

에스파냐의 개입이 독일이 겪는 재앙의 근원이라

믿고 있던 막시밀리안은 평범하지만 치명적인 인식의 오류를 드러냈어.

 

그는 제국에서 한 외국(에스파냐)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른 외국(프랑스)을 끌어드리려 했던 거야.

(더불어 지 이기심도 채우면서 말이지;; -ㅛ-)


...

최후의 저항을 택하는 대신 신교의 패배를 수용했다면 독일의 평화는 가능했을 것이다.

...

비록 그 해결은 1648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강요로 이루어진 최종 해결과 크게 달랐지만 그보다 더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1630년에 항복했다면 독일의 자유는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지배 군주들의 특권이거나 기껏해야 시 정부의 특권으로, 민중의 권리와는 무관했다.

...

하지만 독일 지배자들 중 누구도 집을 잃고

한겨울 추위에 나앉은 사람도,

입에 풀을 문 채 죽은 사람도,

아내와 딸이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없었다. 

극소수만 흑사병에 걸린 게 고작이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롭지도 않았고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정치의 견지에서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p325~327



7. 계속되는 전쟁

1630년 7월 레겐스부르크 회의:

1630년의 레겐스부르크 선제후단 회의의 주요 쟁점은

해묵은 네덜란드 전쟁의 문제와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적대였어.

 

에스파냐는 페르디난트에게 군주들을 소집해 네덜란드 정복을 도와달라고 했지.

그 때까지 마드리드에서는 온갖 방법을 썼지만 군주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실패했어.

 

사실 페르디난트도 그 설득에 자신이 없었지만

레겐스루브크 회의를 개최했을 때 이 점을 첫 번째 요구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지.

네덜란드가 제국을 침략하고 이쒀! 가만 이쓸 꺼야?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지휘를 받고 있던 선제후들은 네덜란드를 적대하려는 마음이 없었어.

 

오히려 에스파냐가 독일 땅을 군사 기지로 사용하는 걸 더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 와중에 새총사령관을 페르디난트 아들에게

맡긴다는 소문이 돌고 선제후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어.

 

교황대사는 군주들의 결정을 지지했어.

네덜란드 전쟁에 동의하지 않고 젊은 대공을 황제로 선출하지 않겠다는 결정 말이야.

그와 함께 온 프랑스 대표는 득의만면했지. 

 

한편, 작센의 요한은 강화 논의를 하려면

1618년과 같은 종교적 화해, 토지반환령의 철폐, 군세의 대폭 감축을 선결 조건으로 내놨어.

 

레겐스부르크에서 페르디난트는  다시 카톨릭 선제후들을 논리로 꺾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지. 

 

기껏 내놓은 게 계승 문제가 불투명한 클레베-윌리히

 공국을 일시적으로 몰수하자는 제안이었는데

이는 라인강 하류에 에스파냐에 발판을 마련해주려는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어.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과 토지반환령이라는 두 장의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어.

 

장군을 포기하면 카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킬 수 있고,

토지반환령을 포기하면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를 진정시키고 늦게나마 회의 참석시킬 수 있었지.

 

황제는 장군을 포기하기로 했어.

 

8년 17일 장군을 해임할 가장 좋은 수단을 논의했지.

뾰족한 방법이 없었지만 의사를 타진할 결과 발렌슈타인은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했어.

흥! 나 없이 뭐가 될 것 같냐?

물론 뒤에서 복수극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어.


무익한 회귀:

발렌슈타인이 해임되자 프랑스는 바이에른의 지지를 잃었어.

페르디난트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되찾았으므로 외국 동맹자들에게 관심을 끊은 거야.

 

그와 동시에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만토바를 장악해 프랑스 공작을 추방했어.

때문에 프랑스는 세력이 위축되었지.

 

페리디난트는 유리한 고지에서 프랑스

카살레와 피네롤로를 에스파냐에 넘긴다면

느베르 샤를을 만코바 공작으로 임명해주겠다고 했지.

 

1630년 10월 13일 그들은 페르디난트의 모든 요구에 잠정적으로 동의했어.

이리하여 레겐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됐어.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해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냈어.

또 하나의 카드인 토지반환령의 철회는 더 큰 이득을 가져다 줄 터였지.

 

스웨덴 왕이 5만을 끌고 진군하고 있었기에

총리인 에겐베르크는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탄원했어.

 

그러나 토지반환령은 정치적 문제인 장군의 해임과는 달리 신앙과 관련이 있었어.

페르디난트의 근원적인 광신주의는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헤쳐나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여기서 그를 좌초시킬 수도 있었어.

 

그는... 토지 반환령을 철회하지 않았어.

 

네덜란드가 클레베와 윌리히에서 철수하자 페르디난트도 전 병력의 철수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지.

Juelich-Kleve-Berg 영역/ 위키피디아

결국 클레베-윌리히를 몰수하자는 제안은 철회됐고, 네덜란드 중립의 골치 아픈 문제는 보류되었어.

 

제국군은 막시밀리안과 틸리가 지휘를 맡았으며

황제는 발렌슈타인이 개입하기 전인 5년 전의 위치로 되돌아갔지.

 

토지반환령은 군주들의 전체 회의에서 상세히 논의하기로 했어.

제위 승계는 확정되지 않았고, 에스파냐의 이해관를 반영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

 

단지 프랑스에게만 외교적 승리를 거둔

페르디난트는 이제 그 두가지 중대한 패배를 극복해야 했어.

사익을 크게 희생하면서까지 에스파냐 정부에 헌신했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레겐스부르크 회의독일을 통합은커녕 분열만시켰고,

시밀리안과 카톨릭동맹은 다시 페르디난트의 정책을 지배하게 되었어.

 

그리고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두 신교 선제후는 새로 반대파를 형성했어.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30년 전쟁 중 독일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끝이자 외국 시기의 시작에 해당한다.

스웨덴 왕이 포메른에 상륙했다.

독일 백성들은 또다시 그들이 시작하지도 않았고

중단시킬 수도 없는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12년간의 재앙 끝에 구원을 가져왔어야 할 회의는

앞으로 18년간 재앙이 더 계속되리라는 신호탄 역할만 했을 따름이다.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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