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1~3) 스웨덴 왕 1630~32년

1. 프랑스와 에스파냐

레겐스부르크 회의 결과:

해당 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어.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싸우는데 전장은 독일이닷!' 

 

이것이 레겐스부르크 회의 요란한 불화에서 나온 유일한 결과였어.

 

페르디난트와 통합 제국의 꿈,

막시밀리안독일 카톨릭 세력,

요한 게오르크와 루터파 입헌주의 세력,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부르봉과 합스부르크는 이것들을 무기로 삼고 서로 경쟁했다네.

(...무기가 이렇게 많으니 전쟁이 끝날 수가 있나;;;)


리슐리외와 스웨덴 왕:

하지만 전쟁은 잠복 상태였어.

리슐리외나 올리바레스도 공공연한 적대를 강행할 형편은 못 되었기 때문이야.

 

리슐리외는 독일의 번영을 위해 에스파냐를

배척하고 독일인의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으나

독일 지배자들은 수행 능력이 없었으니 프랑스 스스로 외국 동맹자로써 에스파냐를 축출해야했어,

이용해 먹을래도 뭐 누가 있어야 말이지. 끄응...

1630년 현재 프랑스가 선택할 수 있는 동맹은 스웨덴 왕 뿐이었지.

 

프랑스-스웨덴 조약은 1629년 12월 부터 준비되었어. 

리슐리외가 대리전을 위해 스웨덴과 협상하는 동안,

올리바레스는 국력을 강화해 정면전의 위험을 완화하는 방식을 택했어.

 

올리바레스는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억압하고,

안트웨르펜의 무역을 되살리고, 식민지를 탈환해 에스파냐를 부흥시키려고 했어.

에스파냐가 무적권 짱 머거야함!


2. 스웨덴 왕의 등장

구스타프2세 아돌프:

'북방의 사자'라고 불리는 그는 상륙할 무렵 서른 여섯살이었어.

성격이 거칠고 힘이 센 그는 행동이 굼뜨고 느렸지만, 웬만한 공병보다도 삽이나 곡괭이를 잘 놀렸어.

 

그는 언제나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였지.

짐은 어떤 전장도 마다하지 않네!

아주 어릴 때부터 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았으며

여섯 살 때 부터 군대를 따라 원정을 다녔고 십대 시절부터 혼자 대사들을 영접했대.

10개 국어을 조금씩 다 알고 있었고 실용적 철학에 열정을 보였어.

 

재위기간 동안 스웨덴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사법 행정을 중앙화하고, 구호시설, 병원, 우편제도, 교육을 체계회하고, 정교한 징병제를 확립했지.

(본문에서 웨지우드 옹의 조롱을 피한 이가 둘이었는데 한 명인 리슐리외에 였고, 한 명은 구스타프야.)

 

그는 민주적인 군주와 거리가 먼,

귀족적인 정치 이론을 갖고 있었지만

스웨덴과 핀란드 백성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통치를 받았어.

 

통상을 장려하고, 천연자원을 개발했고 병기도 다량으로 제작되었어.

오라녜의 마우리츠를 존경했던 그는

군대의 기동성과 효율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마우리츠의 전술을 개발했어.

4파운드 포 / www.thepirateking.com

네덜란드 전문가들을 초빙해 병사들에게

대포 사용법과 공성전을 교육했으며, 가볍고 이동이 편한 포를 직접 실험하고 제작했어.

 

말 한마리나 세 사람의 인력으로 운반이 가능한 가볍고 신속한 4파운드 포를 주로 사용했어.

 

여느 위대한 지도자들처럼 구스타프도 자신의 대의와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지.

루터교를 교육 받았으면서도 칼뱅교를 용인했어.

 

그는 자신의 폭넓은 신교 신앙이 옳다고 확신했으며,

누구에게도 힘으로 신앙의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지.


구스타프는 명석한 통치자이자 노련한 군인있으며,

대담하고 단호하고 충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성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을 압도했던 그의 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진정한 힘은 그의 마음,

그의 엄청난 자기 확신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그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까지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자기가 탄 배는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받은 계시, 예언자의 영감이 깃든 자기중심주의, 바로 이것이 그의 비결이었다.

p341



그의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

악셀 옥센셰르나/ 위키피디아

구스타프가 가장 아끼는 친구는 입이 무거운 학자풍의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였어.

왕은 오직 그의 조언과 질책에만 귀를 기울였대.

 

구스타프는 충동적인 열정을 가진 반면, 옥센셰르나는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였어.

엄청난 에너지와 신속한 판단과 유연한 사고는

주군에 못지 않았고, 기억력과 조직적 수완은 주군과 같거나 더 뛰어났지.

 

또한 두 사람은 체력과 건강이 좋았어.

 

옥센셰르나의 재능은 덜 공격적이었지.

그는 타고난 외교관으로서, 정중하지만 내성적이었고,

기회주의자지만 근본적으로 정직했으며, 속이기도 어렵지만 싫어하기도 어려운 인물이었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대.

그는 개인적인 견해와 관심에서 왕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관대한 사람이었어.

만약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 일했다면 훨씬 더 이득이었을 거야.


구스타프의 군대:

독일은 일찍이 구스타프가 거느린 것과 같은 군대를 본 적이 없었어.

 

전함 28척과 수송선에서 내려준 병력은

병력은 16개 기병대, 92개 보병대에 강력한 포병대로 전부 합쳐 1만 3천 명이었어.

 

기병대와 포병대는 대부분 스웨덴 병사들이었으므로 민족적 통일성이 튼튼했지.

왕은 그들의 군주이자 장군이자 신과 같은 존재였어.

 

그는 병사들에게 기치만이 아니라 그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념에도 충성하라고 명했지.

병사들의 종교는 다양했으나 공식 신앙은 루터교였어.

매일 두 차례 기도를 하고, 주머니에는 찬송가책을 갖고 다녔대.

 

규율은 이론적으로도 흠이 없었고 현실적이었어.

병원, 교회, 학교와 이 곳의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았고, 군사 법전에 언급된 규율 1/4을 위반하면 사형이었어.

왕이 부재중일 때휘하 지휘관들이 즉결처분을 내릴 권한을 가졌지.

 

모든 군대의 근원적인 문제인 급료가 부족한 건 구스타프와 옥센셰르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구스타프는 다른 방식으로 급료를 지불했어.

그는 병사들의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식량과 의복이라도 충분히 지급했지.


 토머스 로는 이렇게 보았다.

"왕은 돈이 없어도 추종자들을 만족시키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모든 병사를 '전우'로 여기고 최대한 상냥한 말과 태도로 대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만 그는 병사들에게 약탈로 생필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p345


구스타프는 공공연하게 민중과 신교를 위해 나섰다고 주장했어.

자신은 황제와 평화롭게 논의하려 했지만

독일 선제후들이 그들이 교회를 보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말이지.


스웨덴의 발트 장악:

구스타프는 1630년 7월 20일 포메른의 수도인 슈체친에 입성했어.

 

그는 전쟁을 기피하는 공작을 협박해서 동맹을 맺고 자금을 지원받는데 성공했지.

이리하여 상륙한 지 불과 3주일만에 그는 발트 해 일대의 요지를 장악했어.

 

추방된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은 그의 동맹자였어.

또한 그는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를 팔츠 선제후에 복위시키겠다고 선언했어.

평생 전쟁의 마스코트였던 프리드리히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 5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마그데부르크의 폐된 신교 지배자인 크리스티안 빌헬름과 친교를 맺었어.

 

마그데부르크는 황제의 성전을 거부한 전략적 요충지로 장악한다면 신교의 옹호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지.

빌헬름5세(좌) 브란덴부르크의 크리스티안 빌헬름(우)/ 위키피디아

스웨덴의 무기와 병력에 힘입어 크리스티안 빌헬름은 1630년 8월 6일 마그데부르크에 다시 입성했어.

물론 시민들은 또 전쟁이 날까 그저 두렵기만했지.


베르발데 조약:

1631년 1월 23일 베르발데에서

구스타프는 리슐리외의 사자를 영접하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동맹 조약에 서명했어.

프랑스와 스웨덴이 통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상호 보호를 약속하는 내용이었지.

 

추가로 독일에서 군대를 운용하는 비용

프랑스로부터 전액 혹은 일부분 받기로 했으며,

리슐리외는 5월 15일과 11월15일에 2만 제국탈러 상당의 자금을 스웨덴 측에 지불하기로 약속했어.

 

지원의 대가로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을 보장하고,

프랑스의 친구인 막시밀리안의 영토를 건드리지 않고,

적어도 조약의 유효 기간인 5년 동안 별도의 강화를 맺지 않기로 했어.

 

구스타프는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했어.

사실 비밀 조약에 뒤통수 맞은 사람이 많잖아 -_-;

그리고 공개조약을 해야 동등한 동망자처럼 보일 테고.

 

리슐리외와 프랑스는 용기와 종교적 열정을 이용해 스웨덴을 덫에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어.


스웨덴 왕은 그들의 사정을 훤히 꿰뚫어보면서 베르발데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프랑스 자금에 힘입어 곧 프랑스의 정책으로부터 독립하게 될 터였다.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놀이는 둘이 할 수 있는 좋은 게임이다.

p349



3. 적의 적도... 적이네? -_-;;

베르발데 조약은 황제의 억압에 벗어나려는 독일의 지배자라면 누구든 가담할 수 있었어.

 

이번엔 신교 군주들이 일치 단결해서 잘 할 수 있을까?


합스부르크의 공세를 맞아 교황은 신교에 동조하고 카톨릭 프랑스도 신교와 동맹을 맺었다.

유럽의 양상은 이제더 이상 종교 분열이 아니었다.

갈등의 정치적 측면이 신앙을 파괴했던 것이다.

정치가와 종교적 광신도는 자신이 갈 길을 명확히 보기 위해 늘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 한다.

p350


이후 2년간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알아야할 게 있어.

구스타프의 진짜 적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개방 정책을 취한 작센의 요한이라는 거야.

 

구스타프도 신앙은 투철했지만 결국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고 발트 해를 확보하기 위해 싸운 거야.

 

그러니 그의 적은 카톨릭이 아니라 독일의 연대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이었지.

그리고 그 지도자는 요한 게오르크였어.

 

이 상황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어.

① 표면에 내세운 카톨릭과 신교의 갈등.(실존하지 않지만 일반인들은 궁극적이고 유일한 문제로 여겼어.)

② 파리, 마드리드, 빈의 공식 정책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정치적 경쟁.

③ 이러한 상황에 묻혀버린 독일인과 스웨덴 침략자의 직접적인 다툼.

 

이것은 동기가 아니라 사실에 관한 논의야.

구스타프의 진정성은 진심이었지만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어.

 

스스로 신교의 옹호자로 자처했지만 있는 그대로 보면 스웨덴의 영토를 독일까지 팽창시키려는 지도자였어.

 

그의 뜻이 이루어지면 스웨덴은 물론 신교 세력도 이득을 얻지만 독일인은 피해를 입게 돼 있었지.

 

작센의 요한은 유럽을 뒤덮은 감정의 연막과

외교의 신기루 속에서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책을 전개했어.


라이프치히 회의:

1630년 겨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이 작센의 요한에게 손을 내밀었지.

그는 재위 11년 동안 좌절과 낙담 속에서 살았어.

신교의 용사 말고 그냥 중립하고 싶다고!

발렌슈타인은 그의 영토를 이용해 덴마크를 원정했고,

구스타프는 그의 영토를 이용해 폴란드를 공격했어.

 

1630년 4월 12 요한의 설득을 받아들여

레겐스부르크 회의를 거부하고 라이프치히에서 신교 대회를 소집해 황제 정책을 논의하기로 했지.

 

3월 28일 라이프치히 회의는 최후통첩의 성격을 가진 선언서를 발표했어.

 

토지반환령이 제국 내 혼란을 야기하고,

제국군과 동맹군을 전쟁에 나서게 만든 근본 원인이라고 규정했지

 

사실상 황제에 대한 선전포고였어.

이 선언서에는 수많은 신교 도시들과 작은 자유시들도 가담했어.

 

요한은 독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어.

게오르크 빌헬름을 신교와 정치 체제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신교의 다수 여론을 장악했지.

외국의 간섭 없이 사태 타결을 하기 위해 드디어 칼뱅파와 루터파가 어깨를 나란히 했어.

 

이제 구스타프의 확실한 동맹자는 마그데부르크, 포메른 공작,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만 남았어.

 

그리하여 신교 독일은 요한과 게오르크 빌헬름,

라이프니츠 선언에서 채택된 강령, 군인 아르님(발렌슈타인의 최고 사령관이었던)이 이끌게 됐어.

 

그들은 페르디난트가 토지 반환령을 철회한다면 

신교 독일의 결집된 군사력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어.

황제가 동의만 해 준다면 전쟁 없이 스웨덴 왕을 물러가게 할 수도 있었지.

글쎄에... 스웨덴 따위야 뭐. 생각해 보께

 

(역시 황제는 요한의 기대를 벗어났지 -_-;;)

어쨌든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전의 지도자였어.

만에 하나 토지반환령을 포기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거야.

 

애매한 서신들이 오가는 가운데

끝내 토지 반환령은 철회되지 않았어.


스웨덴의 전진:

한편, 스웨덴 왕은 북독일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어.

브란덴부르크의 북쪽 국경과 동쪽 국경을 완전히 에워쌌거든.

현재 스웨덴이 장악한 지역

구스타프는 마그데부르크가 이미 스웨덴의 동맹이었으므로 브란덴브루크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어.

 

1631년 봄, 불행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또다시 황제와 침략자의 힘겨루기에서 제물이 되었어.

으어어! 개미 지옥이야! 쫌 다 꺼져!!

한편 발렌슈타인이 모든 보급을 거절한 탓에 틸리는 위기에 처해 있었지.

내 군대도 아닌데 내가 보급을 왜 함?

틸리는 재차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사였어.

페르디난트? 그 양반은 도와줄 여유가 없어 -_-;


마그데부르크의 자비:

1631년 4월 틸리는 파펜하임과 함께 모든 병력을 동원해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어.

마그데부르크의 보급품만이 그들의 희망이었거든.

 

이 위태한 마그데부르크의 상황에도 작센과 브란덴브루크 선제후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어.

(확실하게 쥔 게 없으니 여전히 이러고 앉았네 -_-;;)


라이프치히 회의가 열리는 동안,

구스타프는 자신과 동맹을 맺으면 마그데부르크로

달려가 구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스웨덴 왕은 그런 독일 지배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루터파인지 교황파인지,

제국 사람인지 독일인인지,

노예인지 자유민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부당했다.

그들은 단지 스웨덴 왕의 간섭을 바라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두 신교 선제후와 동맹을 밎재 못하면 구스타프는 더 이상 진격하기 어려웠다.

p359


1631년 5월 20일 마그데부르크가 함락되었고 병사들은 약탈과 잔인함으로 미쳐 날뛰었어.

 

틸리와 파펜하임이 잠재울 수 있는 광기가 아니었고 정오 무렵 스무 군데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어.

많은 병사들이 이 불에 목숨을 잃었고 도시는 폐허가 됐어.


마그데부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유럽 전역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빈에서는 추수감사제가 취소되었고,

신교 국가들은 혐오와 분노를 표출했다.

도시의 군사적 중요성을 빼앗아버린 끔찍한 만행은

정복자들의 의도적인 행위로 널리 알려졌으며,

틸리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마그데부르크와 영원히 짝을 이루게 되었다.

훗날 자비를 애걸하는 제국군 병사들은 '마그데부르크의 자비'라는 명목으로 총살을 당했다.

p363


유럽 전역에서 마그데부르크르 신호탄으로 신교 세력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어.

 

5월 31 네덜란드는 스웨덴 왕과 협정을 맺고

프랑스와 함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며, 곧바로 플랑드르를 침략하려 했지.

 

더 직접적인 것은 6월 중순 게오르크 빌헬름과 구스타프 아돌프가 맺은 조약이었어.

 

전쟁 동안 브란덴부르크의 자원

슈판다우와 퀴스트린 요새를 마음대로 이용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었어.


틸리는 난처해:

한편 틸리의 입장은 점점 어려워졌어.

제국군 전체를 통제하는 총사령관이었으나

동시에 카톨릭동맹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막시밀리안의 지휘를 받는 처지였거든.

 

막시밀리안은 독일 군주들이 참여한 독일 내의 동맹과 리슐리외의 도덕적 지원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어.

이 믿음에 따라 그는 1631년5월 8일 프랑스 정부와 8년간의 비밀 조약을 체결했어.

 

프랑스는 그의 선제후 직위를 인정하고

그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 돕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적들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친구의 친구끼리 적인 상황이었지;;;

 

막시밀리안과 추기경의 외교는 스웨덴 왕을 쉽게 다를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어.

그저 그를 이용해 황제에게 겁을 주고,

독일 내에만 머물게 했다가 나중에 적당한 보수를 주면 스웨덴으로 돌아가리라고 여겼던 거야.

 

이 무분별한 외교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충직한 틸리였어. ㅠ.ㅠ

 

제국군 총사령관으로서는 스웨덴 왕을 격퇴해야 했지만 막시밀리안 휘하 장군으로써는 그러면 안 되잖아.

이도저도 못하게 된 틸리는 작센으로 쳐들어갔지.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요한과 적대할 마음이 없었어.

틸리의 공격으로 요한이 스웨덴의 손을 잡으면

새로운 군주 세력을 형성하려던 막시밀리안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 터였어. -_-;;;;


틸리와 아르님의 군대가 협력했다면 독일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요한 게오르크와 카톨릭 선제후들의 온건한 서신 교환은 아무런 결실도 낳지 못했다.

전쟁 행위에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대신들의 결정을

기다려주지 않는 현장성이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1631년 여름의 중대한 현실은 틸리의 군대가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p366


스웨덴 왕은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와

7월 22일 하벨베르크를 점령하고, 메클렌부르크를 유린했어.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발렌슈타인은 끝까지 틸리를 도와주지 않았지.

 

식량과 주둔지가 절실한 상황에서도

막시밀리안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틸리는 작센 국경에서 방향을 돌려 남서쪽의 헤센으로 진군했어.

아씨. 뺑이는 우리 대장만 치는 거 가튼데? 딴데로 옮기까?

 

당황한 헤센 방백은 서둘러 스웨덴 왕과 동맹 조약을 맺고 도움을 요청했지.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틸리는 마그데부르크의

황폐한 평원에서 또다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어. 

작센으로 진군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돌아선? 작센:

8월 31일 틸리는 남부와 서부에서 황급히

1만 4천 병력을 그러모아 전체 병력의 규모를 3만 6천으로 늘렸어.

(ㅜ.ㅜ 지금 병력으로도 굶고 있는데;;;)

 

나흘 뒤 그는 작센 국경을 넘었어.

9월 6일이 되자 그들은 벌써 라이프치히로 가고 있었어.

하지만 도중에 여러 지역을 약탈한 탓에 노획물이 너무 많아 진군하는 속도가 느려졌지.

 

결국 1631년 9월 11일 작센과 스웨덴의 조약이 체결되었지.

요한은 구스타프가 엘베 강을 넘으면 곧바로 전 병력을 이끌고 즉각 가담하기로 약속했어.

그에게 주둔지와 식량을 제공하고,

비상사태가 지속되는 한 스웨덴 왕에게 주요 지휘권을 넘겨주기로 했지.

 

하지만 바로 여기에 허점이 있었어.

어떤 것이 비상사태인지 판별하는 확실한 기준을 정하지 않은 거야. -ㅛ-;;

 

브란덴브루크의 게오르크 빌헬름은

어쩔 수 없이 침략자의 정책에 구속되었지만

작센의 요한은 자신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두 조약은 큰 차이가 있었어.


계약을 체결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구스타프는

동맹자를 한 번도 신뢰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요한 게오르크가 선의를 가졌다고 믿으면서 행동해야 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독일 입헌주의 세력을 결성하지도 않았고,

제국의 통합성을 방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토착 군주인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침략자의 결정을 통제하는 권한을 누렸을 뿐이다.

p369

(-_-;; 편지는 열라 열심히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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