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3~5)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

3. 신교도와 농민 박해

농민 반란:

1625~26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라앉았어.

 

제국의 채무를 갚기 위해 희생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농민들은 막시밀리안 치하에서 심한 착취를 당했지.

그의 지휘에 따라 황제의 광범위한 종교 칙령이 엄격히 집행되었어.

 

신교 목사와 확교의 교장들은 중벌을 받았고

정부 관리들은 카톨릭이어야만 했어. 

신교 문헌은 폐기되었으며 누구도 국경 넘어 신교 교회에 갈 수 없었지.

 

카톨릭교회는 목사의 빈자리를 빨리 메우지 못했어.

게다가 민중과 정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왔던

신교 귀족의 힘이 크게 약화되면서 농민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였어.

 

1625년 봄 그는 반란의 조짐을 진압하고

10월 신교를 더 가혹하게 탄압하는 명령을 반포했어.

 

1626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린츠를 향했어.

페르디난트와 막시밀리안은 둘 다 군대를 파견했지.

지도자가 죽고도 반란 세력은 잠잠해지지 않았어.

10월 10일 벨스 전투에서는 제국군을 격퇴했지.

 

1626년 11월 8일 새 증강군이 왔어.

사령관은 파펜하임 백작 고트프리트 하인리히였다.

(적에게 잔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임 -_-;;)

파펜하임/위키피디아

 

반란군들은 파펜하임에게 밀려나

푀클라브루크와 볼프제크에서 두 차례 심한 학살을 당한 끝에 결국 패배했어.


이 전쟁에서 누가 지고 누가 이겼건 간에,

어느 종교가 성하게 되고

어느 군주가 부를 얻게 되었던 간에,

모든 대가를 치르고 희생된 것은 농민들이었다.

275p



4. 발텔리나, 에스파냐의 보급로

1627년 전쟁 10년차:

북부 해안에서 격랑에 찬 한 해가 가고,

1627년 전쟁이 10년째 접어들었지.

 

독일 외부에서는 발텔리나가 에스파냐에게 개방되고 위그노 반란이 확산되는 중이었어.

 

영국은 지난 2년간의 외교를 뒤로 하고

총신인 버킹엄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뒤, 함대를 보내 라로셸 지역의 반란 세력을 지원했지.

 

그러자 리슐리외는 군주제를 구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확장하고, 에스파냐에 우호의 손길을 뻗었어.

(정말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로구먼;;)

 

제국 전역에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어지.

주둔군들 상황, 만스펠트 없는 만스펠드 군대 포함

서부 독일 전역에 흉년과 기근이 들었어.

군대들이 수시로 이동해서 질병이 꾸준히 확산되어 많은 지역들은 전염병에 시달렸어.

 

브란덴부르크의 상황은 더 나빴다.

그곳에서 발렌슈타인은 덴마크군과 만스펠트의 잔여 병력이 만나는 것을 차단해야 했지.

그곳에 보급대는 지역에 보급을 요구했어.

지역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은 6만 6천 굴덴에 달했대.

그래서 주민들은 마지막 한 줌까지 쥐어짜졌지.

 

브란덴브루크에서는 견디다 못해

황제에게 대사를 보내 항의했지만 발렌슈타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줄 몰랐다?며 여전히 브란덴부르크를  존중한다는 애매한 서신만을 들려 보냈어.


만스펠트 가고 발렌슈타인 오고:

전쟁이 더 확산된다면 독일은 완전히 파괴될 판이었어.

이제 제국의 황제에게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었으니 평화를 막을만한 일은 없어 보였지.

 

하지만 1627년에 발렌슈타인 전투 병력을 충원하고 휘하 장교들을 라인란트까지 보냈어.

또한 그는 성직 선제후들의 불만을 페르디난트 탓으로 몰아붙였지.

 

그는 에스파냐가 황제에게 제안한 발트 계획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자신도 함께 실행하고 싶어 했지.

 

그래서 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을 점령하고,

그해 봄 메클렌부르크와 홀슈타인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하려 했지.

 

하지만 에스파냐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어.

바보가 아닌 이상에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건 알 수가 있었을 거야.

황제가 이미 데사우 데사우 전투에서 그에게 50만 굴덴을 빚졌고, 달이 갈수록 채무는 늘어갔거든.

 

불만의 목소리가 처음 빈에 전해졌을 때 발렌슈타인은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위협했어.

 

그만 두까여? 근데 나 없이 군대 운영이 되시려나?

얼마 뒤 그는 브뤼크에서 에겐베르크와 만났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직후,

보헤미아에서 거둔 세금은 전액 그의 군대가 전용했고,

자신의 영지에서 완전한 군주로서 권리를 행사했지.


막시밀리안 VS 발렌슈타인:

페르디난트는 루터에서의 승리와 덴마크 왕의 몰락에 약간 도취된 상태였어.

 

광인 크리스티안이나 덴마크 왕도 이겨먹은데다

독일 내에서 제국군을 홀로 맞설 군주도 없었으니

발렌슈타인 군대만 있으면 북유럽의 주교구에서 권력을 확립하고 발트 해마저 재패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

 

막시밀리안은 명예로운 독일 정책으로 돌아가야 했어.

황제의 권력이 미쳐 날뛰기 전에 강화의 자세를 취해야 했지.

 

1627년 1월 그는 카톨릭동맹을 불러모은 뒤,

평화와 군주권의 안정을 위해 발렌슈타인의 힘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페르디난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그들은 강화를 요구하면서 막시밀리안과 우호관계에 있던 카톨릭 군주인 루이 13세를 중재자로 내세웠지.

 

하지만 빈 정부는 리슐리외의 동기를 의심했고,

신교 세력은 여전히 그를 배신자로 여겼기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휴전을 맺지도, 발렌슈타인을 억제하지도 못하고 말았어.

근본도 없는 놈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네. 끄응...


불운한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크 빌헬름:

1627년 봄 발렌슈타인은 군주권을 더욱 무참히 짓밟는 원정을 재기했어.

 

게오르크 빌헬름은 독일에서 가장 선한 군주로 그의 정책은 자신의 왕조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어.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의 누이와 결혼한 게오르크

게오르크 빌헬름의 영토는 만스펠트가 좌초한

슐레지엔과 덴마크 왕의 본부 사이에 위치해 있었어.

이 지리적 우연 때문에 그가 추구하는 중립 노선의 결실은 맺을 수 없었지.

 

발렌슈타인은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를 침략할 생각은 확실히 없었어.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스웨덴 왕 구스타프였어.

그는 빌헬름에게 필라우 항구를 양도하라고 협박해서 프로이센을 활용하고 있었거든.

 

1627년 구스타프가 패배한 크리스티안을 지원하러 온다는 소문이 나돌았어.

그게 사실이라면 구스타프는 브란덴브루크를 가로질러야 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구책의 일환으로

막시밀리안을 선제후로 승인하는데 동의했다.

그의 대사는 어렵사리 발렌슈타인을 만나 크로센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해달라고 애걸했으나,

그 때 침대에 있던 발렌슈타인은 머리를 배게에 처박은 채 대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다.

p283



사라져가는 신교의 운명:

1627년 여름이 되기 전에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브란덴부르크로 진격했어.

유능한 부관인 브란덴부르크 태생의 신교도인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이 지휘를 맡았어.

(으엌! 또 게오르크다아아아!!)

 

다른 도리가 없던 게오르크 빌헬름은 최대한 품위를 지켜 항복했어.

 

이 무렵 성과를 거두지 못한 대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변함없이 존중한다는

페르디난트의 서신을 지닌 채, 그 서신이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빈에서 돌아오던 중이었어. -_-;;

 

이렇게 브란덴부르크가 점령되자 

발렌슈타인은 흩어져 있던 신교 군대를 쉽게 제압했어.

 

리슐리외에게서 실패한 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었던 영국 정부조차 선박도 자금도 보내지 않았어.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에 빌붙어 간신히 먹고 사는 처지였으므로 보낼 게 아무것도 없었어. 

게다가 그의 집은 빚쟁이 상인들이 에워 싸고 있었대.

 

그러자 프리드리히도, 패배한 덴마크 왕도

남은 동맹자인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도 스웨덴 왕인 구스타프에게로 시선을 돌렸지.

 

1627년 8월 4일 만스펠트의 잔여 병력은 베른슈타인에서 항복하거나 달아났어.

만스펠트가 죽은 뒤 지도자가 된 덴마크인 미츨라프는

남은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도망쳐 폴란드에서 스웨덴군에 가담했지.

 

9월 발렌슈타인과 틸리는 엘베 강 하류에서 합류했어.

10월 틸리는 독일에 남은 주둔군의 규모를 줄였지.

발렌슈타인은 덴마크 왕을 추격해 홀슈타인 국경을 넘었고 마지막 남은 기병들이 할보르크에서 항복했지.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유틀란트의 산재한 촌락지대에서 겨울을 날 차비를 했어.


5.페르디난트와 발렌슈타인

보헤미아 새 헌법 반포:

발렌슈타인이 북부에서 정복 활동을 벌이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남부에서 굳히기에 들어갔어.

 

같은 해에 보헤미아에 새 헌법이 반포되었지.

보헤미아는 여전히 형식상으로는 자치였으나, 

왕위가 세습되고 왕이 관리를 임명했으며 의회는 모든 집행력을 잃었어.

 

여름에는 여전히 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즉각 개종하거나 망명해야 한다는 칙령이 반포되었어.

이 마지막 숙청으로 페르디난트의 백성 2만 7천명이 나라를 떠났대.


페르디난트(3세) 대공:

1627년 여름 황제는 보헤미아에 방문하기로 했어.

다시 대관식을 치를 처지가 못 되었기에 둘째 아내의 황후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녀의 대관식은 유례없이 화려하게 거행되었대. 

포도주 분수는 이 양반도 만들었다고...-_-;;;

 

그 아들은 호탕한 아버지와 달리 신중한 성격이었어.

(페르디난트2세의 아들 페르디난트3세-_-;;)

페르디난트 대공은 새 헌법 아래에서 마음에도 없는 보헤미아의 첫 세습 군주가 되었어.

페르디난트 3세/ 위키피디아

보헤미아 반란에서 남은 것은 헤이그의 파산한 궁정과 15만 명에 달하는 망명자들뿐이었지.


발렌슈타인:

이제 전체적으로 재정이 박살 나서 독일을 이끌어갈 만한 세력은 발렌슈타인 정도였어.

 

발렌슈타인은 황제에게 정부의 돈은 한푼도 안 쓰고

정복한 지역의 자원만으로 앞으로 6년간 전쟁을 더 지속할 수 있다고 보고했어.

 

그는 홀슈타인, 알자스 등을 정복해 제국 전역에서 페르디난트의 권력을 확고히 다질 심산이었어. 

북부에서 그의 지위는 더없이 확고했지.

 

에스파냐의 자금이 폴란드에 수혈된 탓에 스웨덴 왕은 그곳에 발이 묶여 있었어.

 

이 상황에서 합스부르크는 발트해에 함대를 파견하고, 

한자동맹의 도시들과 연계해 새 무역회사를 설립했어.

봄이 되자 발렌슈타인은 발트 해로 전함 스물네 척을 파견했고, 에스파냐도 같은 수의 전함을 보냈지.

 

페르디난트가 프리드리히를 내쫓은 것은 라인을 획득하기 위해서였어.

이제 그는 발트 해까지 장악하기 위해 또다시 반란자의 재산을 빼앗아 동맹자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지.

 

1628년 3월 11일 그는 메클렌부르크 공국과 그에 딸린 공작 직위와 특권을 발렌슈타인에게 수여했어.

(...이게 황제인지 강도인지 -_-;;)

 

막시밀리언 때도 반발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도적 군주였고 반강제로라도 선제후들의 재가를 얻어냈어.

하지만 발렌슈타인은 귀족보다도 지위가 더 낮은 소지주 출신이었어.

 

만약 황제가 상황을 통제했다고 믿었다면 그조치는 지지를 받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에스파냐인들도 독일 군주들도

황제가 단지 발렌슈타인의 꼭두각시라고 여겼고 심지어 발렌슈타인도 같은 생각이었어.

물론 단순한 꼭두각시는 아니었지만...

 

작센의 요한은 헌법을 걸고 발렌슈타인의 승진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허사였어.

한 번쯤은 내 말도 들어줄만 하지 않냐?

망명 중인 메클렌부르크의두 공작은 스웨덴 왕에게 도와달라고 애걸했어.

 

그러나 무엇보다 분노한 것은 막시밀리안이었지.

개인적인 야심과 왕조적 탐욕을 여전히 품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 군주들의 자유를 위해 보잘것없는 병력을 모아 다시 저항에 나섰어.


뮐하우젠 회의:

1927년 겨울~ 다음해 초봄까지 독일 선제후들은 뮐하우젠에서 회의를 가졌어.

 

발렌슈타인이 심각하게 위험다고 주장하는 

막시밀리언의 경고는 주목받지 못했어.

그가 오버팔츠를 페르디난트에게서 세습 재산을 받은 까닭이었지.

 

그러나 1628년 3월 발렌슈타인이 승진하자

겁에 질린 선제후들은 회의가 끝나기 전날 밤 마침내 의견 통일이 되었지.

 

황제는 근본적으로 형식과 절차에 사로잡힌 사람이야.

그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데 자부심을 품었으며,

자신의 불법적 행위도 그럴듯한 근거로 정당화했어.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몸소 보여줬지.

(웨지우드 옹의 조롱투가 넘모 좋아 ㅋㅋㅋ)

 

그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맹세한 모든 서약을 실천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어.

제국의 절차를 존중한 전해에 선제후들에게 자신의 맏아들을 '로마인의 왕'으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지.

무려 제위 승계를 보장해달라는 말이었어.

내 아들 황제 시켜죠 뿌우우우~!

황제는 발렌슈타인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권력

전부 사용하면 형식이나 절차 따위는 내팽개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 

 

페르디난트는 한 손으로 법을 파괴하고

다른 손으로는 법을 움켜 쥔 채 무엇보다도

신의 왕조가 전통적인 양식으로 제위를 계승하기를 간절하기 바랐지.


발렌슈타인이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된지 17일이 지났을 때,

마인츠 선제후는 페르디난트에게 동료 선제후들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를 전달했다

.발렌슈타인에게 계속해서 제국군의 지휘를 맡기되,

그를 군주로 선출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마인츠 선제후의 연구리를 찔렀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장군기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는 동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는 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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