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1~3) 에스파냐의 경보.독일의 경종 1619~21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19.
1.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의 왕위 수락:
그의 왕위 수락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고
유럽 외교 주역들을 모은 것은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에 적대적 신교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켰어.
팔츠라는 지역 자체가 예전부터 네덜란드의 저항과
에스파냐의 진출 사이에 위치한 보루였어.
그것만도 벅찰 건데 보헤미아 왕이 되었으니 제국의 침탈에 맞서 군주의 자유를 보호해야 했지.
(프리드리히에게는 무리무리요 -_-;;)
프리드리히는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지도자라 만들려는 온갖 시도를
다 무위로 돌릴 정도로 별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인물보다 사건이 더 중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 없다.
...
하지만 그렇게 무기력한 지도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그들은 프리드리히가 몰락할 때까지,
즉 그가 보헤미아와 팔츠령을 잃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이미 틀어진 사태의 틈을 메우려 애쓰면서 끊임없이 망설였다.
p140
새 왕 프리드리히의 초반:
페르디난트의 여론은 좋지 않았고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개인적인 슬픔도 깊었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신교도들이 보헤미아인들과 동맹을 맺어 초조함도 더 했겠지.
베틀렌 가보르는 그들과 브라티슬라바를 점령하고,
급료도 못 받은 페르디난트 군대를 도나우 강 너머로 몰아내고 빈으로 향하면서 주변 시골을 유린했지.
빈의 관리는 이제 신만이 오스트리아 왕가를 구할 수 있다고 보고했대.
빈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기근이 임박한 상태에서 베틀린 가보르를 기다리고 있었어.
(신교)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과
(구교, 반에스파냐) 베네치아 공화국이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인정했어.
부용 공작도 지원을 약속했고 스위스인들은 발텔리나를 장악해 에스파냐의 증원군을 막겠다고 했어.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서 환호 받았고
국경을 넘기 전에 보헤미아 헌법을 보장하겠다고 했어.
희망적인 분위기와 아내의 출산까지... 씐이 났겠지?
하지만 새 왕은 곧 무기나 병력을 마련할 자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_-;;;
그런데도 도시 전체를 사치스럽게 꾸며대고
분수에서 포도주가 흘러나오게 한데다가
"신과 의회가 내가 왕관을 주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은화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데 쓸 돈은 있었다네.
(-_-; 뭐, 뭐라고?)
1619년 12월 18일 프리드리히 아내는 출산했고
일주일 뒤 페르디난트의 병든 아들은 사망했대.
그러나 여기까지였어.
끝내 신교 세력의 결집된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어.
초반 자금 지원 이상의 행동은 없었던 거야.
잠시 트리어 선제후가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와
이렇게 말했다.
"보헤미아에서 마음껏 싸우게 놔둬라.
우리는 계속 좋은 친구로 남을 테니까"
그러고는 다시
낙관적인 방관자의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라인 지역의 군주들에 관한 한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p143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루터파
작센의 요한은 내심 결국 새 왕으로는 자신이 선택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 일단 왕관을 거부하는 척 하면서
보헤미아 신교 보호자가 된 담에 페르디난트에게 해결책을 내 놓을 셈이었지.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왕으로 선출됐지.
그는 두 몫의 선제후 투표권이 생겼고고 엄청난 지역을 차지한 힘센 군주가 될테지.
(-_-;; 잘 해낸다면 말이지만)
게다가 프리드리히의 누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요한이 경계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결혼했어.
프리드리히가 왕이 되기 전에 요한은 자신이 제국의 중재자라고 여겼어.
그러나 선출이 끝난 뒤에는 점점 강성해지는
북쪽의 브란덴부르크와 남쪽 보헤미아 사이에서 고립될 위기에 처한 군주로 전락했지.
게다가 궁정 목사는 보헤미아 정부가 루터교를 버리고 적그리스도 칼뱅교로 넘어갔다고 비난했어.
그러면서 페르디난트의 명분을 지지했지.
(루터교는 카톨릭보다 칼뱅교가 더 시럿! 뿌우 -ㅛ-)
안할트는 요한의 태도에 당황해서 미끼를 하나 던졌어.
신교 지배자들을 전부 불러 뉘른베르크에서 회의를 열 게 한 거야.
뉘른베르크 모임:
뉘른베르크 모임은 프리드리히의 약점과 신교 군주들의 불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어.
신교 연합 군주들만 참여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당연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미끼가 뭐 이 모냥이야 -_-;;;)
모인 사람들은 마지못해 프리드리히가
독일에 없는 동안에도 그의 라인 영토(팔츠 국경)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보헤미아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려 하지 않았어.
뮐하우젠 모임:
1620년 3월 페르디난트가 뮐하우젠에서
소집한 회의는 반대파의 힘과 단결을 잘 보여줬어.
그동안 프리드리히는 왕관을 황제에게 뺏은 게 아니라,
보헤미아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오스트리아 대공에게서 되찾아온 것이라고 주장했어.
보헤미아가 제국 밖에 위치한 독립국이라 이거지.
그니까 보헤미아 반란군은 외국 군주에 맞서 대외 전쟁을 한 것일뿐, 제국의 평화를 해친 게 아니란 거야.
그니까 황제의 권력으로 그를 응징하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이 주장은 뮐하우젠 회의에서 무너졌어.
참석자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카톨릭동맹, 작센의 요한 선제후의 대표단이었어.
(엇! 요한씨가 왜 요기서 나와?)
여기서 페르디난트는 오버 작센 지구에 속한
세속화된 주교구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면서 루터파와 카톨릭의 지지를 모두 얻었어.
그 대가로 보헤미아가 제국의 일부분이라고 규정했지.
따라서 프리드리히는 징벌의 대상이 되었어.
1620년 4월30일에 프리드리히에게 6월1일까지
보헤미아에서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이 반포되었어.
선전 포고나 다름 없는 명령이었지.
이제 황제는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보헤미아의 적법한 왕으로 반역자를 처단하게 됐어.
2. 망할 안할트
등을 돌린 유럽, 위태로운 팔츠:
프리드리히의 위치는 독일에서도 취약했지만,
유럽에서는 더 취약했어. -_-;;;;;
그의 처남인 영국왕 제임스1세 조차 심드렁했어.
제임스1세는 누나인 엘리자베스는 좋아한 것 같은데 프리드리히는 별로 였는지 어쨌는지;;;
덴마크 왕은 작센 선제후에게 프리드리히를
지원하라고 말은 했지만 합스부르크와의 무역 분쟁 때문에 돈도 시간도 인력도 부족했어.
스웨덴 왕은 프리드리히의 격려를 받고
브란덴부르크로 와서 선제후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무력 개입은 하지 않았어.
폴란드와 전쟁 중이라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지.
베네치아는 마지못해 독일로 수송되는 병력을 막아보겠다고 했지만 별 관심 없었어.
사보이 공작은 얻은 게 없어서 개 빡친 상태라
만스펠트 군대에 대한 자금 지원도 취소하고 에스파냐 군대가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걸 허락해줬어.
베틀렌 가보르는 트란실바니아 사태로 어쩔 수 없이 빈에 대한 포위를 풀었지.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모냥만 충성이라도 받으려면 각종 지원금과 보수를 달라고 요구했어.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지. -ㅛ-)
틀려 먹었어, 안할트:
그래도 안할트의 동맹자들 가운데 중요한 네덜란드와
프리드리히를 버릴 수 없는 우군도 남아있긴 했어.
그들은 만약 프리드리히가 패배해 그의 라인 영토가 위험해진다면 첫번째로 당할 입장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또 다시 안할트의 판단은 빗나갔어. -_-;
네덜란드는 프리드리히가 라인을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신교 연합의 변절도 예상하지 못했지.
이제 에스파냐가 팔츠령을 침략할 경우 독자적으로 라인 지역을 방어해야 할 판이잖아.
(이봐, 안할트 이제 어쩔거야? T^T)
네덜란드 연방에서 내부 혁명으로 시작된
마우리츠는 독재 체제는 아직 확고하지 못해서
에스파냐와 휴전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권력을 공고히 해야만 했어.
라인에서 경솔하게 굴다가 전쟁을 벌이면 큰일이라구.
그래서 네덜란드 연방은 프리드리히에게 한달에 5만 플로린을 제공하고 소규모 병력만 파견하기로 했어.
물론 이 정도로는 안할트의 기대에는 택도 없었지.
이 작은 제스처로 팔츠령을 구할지는 미지수였어.
(미지수는 무슨 미지수, 틀렸어. 돌아가! -_-;;)
3. 프랑스와 에스파냐
유럽의 큰 형님?들은 두 명 더 있었지.
프랑스 왕 루이13세와 에스파냐 왕 펠리페3세 말이야.
프랑스의 루이13세:
프리드리히는 프랑스 정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이모부인 부용 공작에게 의지했어.
부용은 신교도이자 왕권에 반기를 든 경력이 있는 집요하고 파렴치한 인물이었어.
왕인 루이13세를 설득할만한 인물이 아닌거지.
부용 공작은 말이 너무 많았다.
페르디난트가 폐외되기 전엔 1619년 초봄
프랑스 왕이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했을 때
부용은 그만 말을 참지 못하고,
루이는 프랑스에서 기사단을 만들지만
자신은 독일에서 왕을 만든다고 실언했다.
감춰야 했던 음모를 털어놓는 바람에 부용이 보헤미아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비쳤다.
...
일개 프랑스 귀족이 왕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은 젊은 군주의 등을 돌리게 하기에 딱 알맞았다.
p148
루이13세는 독실한 카톨릭이었어.
보헤미아의 선거 소식을 듣고 그는 즉각 교회를 위해 새 왕권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
한편 프리드리히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2위였어.
제임스1세가 비리비리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프리드리히는 영국 왕도 겸하게 될 터였어.
(-_-;; 그럼 영국도 말아먹겠지.)
그런 권력의 팽창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겠지.
그런데 황제나 에스파냐 왕이 프리드리히의 반란을
구실로 삼아 라인팔츠를 장악한다면, 프랑스는 네덜란드 못지않게 불리한 처지가 되 버려.
따라서 중간노선이 최선이었어.
(부용 공작이고 자시고 그게 문제가 아니었네;;;)
울름 조약:
1620년 초여름 파리에서 독일로 출발한
프랑스 사절단은 울름에 이르렀을 때
두려움에 떠는 신교 연합의 소규모 군대와
잘 훈련된 카톨릭 동맹(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의 대규모 군대가 대치하는 걸 봤어.
신교 연합 모두 프리드리히 전쟁에 개입하기 싫었고 모두 막시밀리언의 군대를 두려워했어.
그래서 프랑스가 먼저 나서서,
신교 연합이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카톨릭동맹도 그들의 중립성을 존중하자는 제안을 했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선뜻 그 계획을 지지했어.
신교연합의 군주들도 무엇보다 안전과 책임의 면제를 원했으므로 옳타쿠나 했지.
이리하여 1620년 7월 3일 울름 조약이 체결되었어.
프랑스 입장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성과를 보헤미아에 한정시키려 한 것이겠지.
딱 보니까 신교 연합이 기냥 밀릴 거 같자너...
그럼 합스부르크 위세가 너무 커질까 봐;;;
프랑스 정부가 예상한 대로 신교연합이 행동했다면
그 방침은 매우 적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교연합은 울름 조약을 구실로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프랑스 각료들은 프랑스의 외교가
라인 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채 오히려
프리드리히의 적들을 저지할 마지막 장치를
제거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p150
어쩔거야, 프랑스:
울름 조약이 체결될 무렵 스피놀라가 팔츠령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
울름을 떠나 빈으로 간 대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황제는 에스파냐 대사의 수중에서 놀아나고 있으며,
프랑스가 추진한 타협책은 간신히 체면치레만 하고 있다고 했지만 새로운 방침을 모색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루이를 미워?하는
태후의 음모와 위그노 봉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어.
루이 13세도 박복하다면 박복하지.
프랑스 정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진출을 가로막았던
마지막 장벽을 무심코 무너드린 뒤 그 후 3년 동안 유럽 정치에 얽혀들지 않았어.
(-"-;; 이, 이놈들....)
합스부르크 왕조는 조금씩 힘을 결집해 폐위된 페르디난트를 지지하고 나섰어.
펠리페 3세는 처음에는 망설였지.
페르디난트에 능력에 회의적이었고 에스파냐도
빈곤과 불만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그로서는 힘을 아껴두었다가 네덜란드 전쟁이 재개될 때 사용하고 싶었어.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는 사태를 더 명확하게 파악했어.
그들이 보기에 프리드리히가 왕위를 차지한 것은
페르디난트의 명분을 새롭게 해 준 꼴이었어.
즉, 라인 지역에서 신교 기지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폴츠령을 정복하는 구실이 된 거지.
그리니 펠리페3세가 아무리 무기력하게 굴어도
스피놀라는 진군해야 했겠지;;;
스피놀라:
제네바 귀족이자 타고난 군인이었던
암브로도 스피놀라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공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어.
그는 네덜란드 전쟁에 광적으로 열정적이었어.
열여덟 시간씩 일하고 사재까지 털어서 군대를 키웠대.
그에게 유럽은 라인을 지배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무대에 불과했어.
그는 프리드리히가 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규모 병력을 차출했지.
3년 전인 1617년,
페르디난트는 알자스를 에스파냐에 넘기는
조건으로 황제 선출에서 에스파냐의 지원을 확보했지.
이제 군사적 도움이 절실하니 더 큰 걸 제안했어.
(지 것도 아닌데 뭘 자꾸 준다는 거야;;)
스피놀라는 프리드리히의 라인 영토를 정복한다면
상당부분이 에스파냐의 몫으로 떨어질 것이고,
네덜란드와 자신 사이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신교 장벽이 제거될 거라는 걸 알았지.
황제는 프리드리히가 제국의 평화를 해쳤으니
그의 영토를 몰수해서 자기 친구(동맹)들에게 나눠주기로 했어.
이건 페르디난트가 제위에 오를 때 서약한 사항,
즉 독일 영토를 의회에 허가 없이 처분하지 않겠다는 서약에 모순되는 행동이었어.
(이러니 입헌주의자들 그 난리지 -_-;;)
그렇지만 사태의 법적 측면은 항상 실제로 몰수가 일어난 뒤에 고려하게 돼.
스피놀라가 출병 하기 직전에 울름 조약이 성사되어서 신교 연합 군대는 철수했거든.
이는 라인란트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걸 의미해.
(이제 망했어. 아직 28년이나 남긴 했지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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