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1~3)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1621~25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21.
1. 유럽의 이해관계
라인 강:
이해관계의 중심은 블타바 강에서 라인 강으로 이동.
보헤미아에서 페르디난트 황제는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전제 권력의 기반을 다졌어.
블타바 강 유역의 네 지역이 모두 항복했지.
막시밀리안은 발란자들의 목숨과 재산 보전에 대해 의례적인 약속을 선언 했어.
그런 탓에 그도 황제도 그 약속엔 신경 안 썼어.
카톨릭 복귀:
막시밀리안이 철수하자 페르디난트는
카를 폰 리히텐슈타인을 프라하 총독으로 임명했어.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소심하고, 신중하고, 적당히 부정직하고, 상당히 약삭빠른 인물이었지.
프라하가 함락된 지 5주도 안 되어 예수회가 복귀했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에서는 신교도의 이주를 막기 위한 엄중한 조치가 취해졌어.
무능했던 투른은 도망갔는데 더 나은 인품의 슐리크는 체포되어 프라하의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지.
칼뱅교와 양형영성체주의 이단들은 뿌리가 뽑혔으나, 루터파 교회는 작센 선제후와 약속을 통해 용인되었어.
페르디난트는 세 가지 방침을 정했지.
① 반란에 연루된 자들 정치. 경제적으로 파멸.
②민족적 특권 폐지
③신교 근절
리히텐슈타인은 불안한 마음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신중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무시됐어.
보헤미아에 대한 응징은 곧 새 정책의 출범이었지.
이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신앙 면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고,
카톨릭 유럽의 재건에 가장 중요한 토대인 빈에서 그 관리를 맡겠지.
1621년 5월 마주막 주에 처형에 대한 판결문이 페르디난트의 서명을 받기 위해 빈에 도착했어.
패배한 신민들에게 페르디난트의 힘을 각인시키는데 좋은 수단이었겠지.
반란 주동자들은 1621년 6월 21일 프라하
시청 앞 광장에서 전원 처형되었어.
이 때 안드레아스 슐리크도 처형 됐지.
(혹시나 해서... 하인리히 슐리크랑 다른 양반이양)
리히텐슈타인이 우려했던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을 구하려는 시도도 없었어.
프라하는 침묵했다.
부가 사라지고, 무역이 중단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지도자들이 죽었다.
프라하 바깥, 보헤미아 바깥에서는 신교 소식지들이 분노를 토로했다.
...
하지만 보헤미아는 그럴 인물이 없었다.
최고의 인재들이 빌라호라와
시장에서 칼과 도끼에 맞아 죽었다.
국경 너머에는 도피한 왕과 망명객들만 있었으며,
나라 안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무리들과
겁쟁이들, 중립을 취한 자, 처형된 사람들의 과부와 아이들뿐이었다.
p188
2. 합스부르크를 위하여
페르디난트의 야망:
페르디난트의 야망은 자신의 영토와 제국 전역에서 절대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어.
합스부르크 왕조의 미래를 그런 관점에서 보았지.
반면, 에스파냐 왕은 네덜란드를 재정복하고
에스파냐가 번영을 되찾아야만 왕조가 안전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어.
둘 다 궁극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겼지만,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정책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지.
브뤼셀과 에스파냐의 이전 지배자:
알브레히트 대공과 펠리페 3세의 죽음은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어.
네덜란드의 독립은 대공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지.
처음엔 에스파냐에서 그걸 이용하지 않을 것 같았어.
남편을 잃은 이사벨이 계속 정치를 담당했고, 스피놀라도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었거든.
그러나 법적으로 임명된 대리인에 불과한 그들은
점차 에스파냐의 새 지배자들에게 권한을 침해당했어.
이 새 지배자들은 십대였던 소년 왕 펠리페4세와 그의 총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이었어.
펠리페 4세:
펠리페4세는 아버지보다 약간 더 똑똑했지만 훨씬 더 불성실했어.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사냥과 투우 애호가로서 난봉꾼이 될 소질이 다분했어.
정치적 상상력이 없고 종교에 관해서는 완고했지.
당연히 모든 권력은 총신인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에게 넘어갔어
올리바레스 백작:
올리바레스는 엄청난 에너지와 상상력으로 주군의 무능과 무관심을 보충했대.
(-0- 어깨 뽕인가?;;; 어깨 넓이가 ㅎㄷㄷ)
그의 책동으로 전왕의 대신들은 거의 다 직위에서 쫓겨나고 새 정부는 완전히 그가 장악했어.
권력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그는
왕을 모신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리는 편이었어.
사실상 군주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는 일편단심 왕에게 충성했어.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명철하면서도 변덕스러운 견해에 의지해 단독으로 조국의 운명을 이끌었대.
1621년 올리바레스 백작의 주요 관심은
팔츠령을 지배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을 찾는 것이었어.
그래서 그는 에스파냐의 보호 아래 프리드리히를 복위시키고자 했대.
이 구상은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었어.
하나는 위험한 존재였던 영국을 달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끌어들이려는 거였어.
(-_-;; 이건 진짜 너무 판단 미스가 아닌가?)
막시밀리안은 나름 카톨릭 입헌주의자였으니까.
좌우지당간 이 구상은 진행될 수 없었어.
페르디난트가 당연히 환영했을 리가 없고
마침 만스펠트와 호러시 비어가 이끄는 프리드리히 군대가 다시 공세에 나섰거든.
(네덜란드에서 만스펠트한테 입금 해준다고;;)
게다가 막시밀리안도 태도를 바꿨어.
만스펠트가 오버팔츠를 기지로 삼아 보헤미아 공격에
나서자 페르디난트는 막시밀리안에게 니 몫의 전리품을 잃고 싶지 않으면 참전하라고 했거든.
자기 몫에 전리품을 잃기 싫으니 참전할 수 밖에.
굳세어라, 만스펠트:
1621년 9월 23일 막시밀리안은 프리드리히측 도시인 함(Cham)을 습격해 점령했어.
병력은 우세했지만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만스펠트는
막시밀리안과 협상 후 프리드리히 뒤통수를 쳤어.
그러나 그는 곧장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저버리고 라인팔츠에 주둔한 프리드리히의 영국 동맹군에 가담했어.
(-_-;; 진정한 용병이로고...)
덕분에 막시밀리안은 정당하게 프리드리히의 라인 영토를 침략할 수 있게 되었지.
그는 틸리 장군을 보내 만스펠트를 추격하게 했어.
당시 스피놀라는 네덜란드에서 북부 연방에 대한 정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어.
브뤼셀과 마드리드 정부는 조약만으로도 안전할 작은 나라를 위해 전쟁으로 돈을 쓰기 싫었지.
라인으로 보낸 코르도바 장군은 명령에 복종했어.
틸리는 단독으로는 만스펠트를 공격할 수 없어 실망을 안은 채 오버팔츠의 겨울 숙영지로 퇴거했지.
코르도바는 별달리 움직이지 않았고,
호러스 비어는 소규모 병력을 라인 강에 주둔시켰으며,
만스펠트는 군대의 식량과 주둔지를 찾아 알자스로 건너갔어.
전쟁은 점차 보헤미아, 라인팔츠, 오버팔츠, 라인 주교구, 알자스로 확대되었어.
만스펠트의 군대는 전염병을 옮기고 다녔어.
식량을 찾아 시골을 헤집고 다녔고 닥치는대로 불태우고 파괴했지.
후퇴하는 평화:
백산 전투 후 1년이 지났으나 평화는 아직 요원했어.
마드리드의 올리바레스와 브뤼셀의 이사벨은 영국 왕과 함께 프리드리히가 팔츠령을 수복하도록 지원했어.
이 무렵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고 자금을 지원받아
새로 병력을 마련한 프리드리히는 자신감에 넘쳤어.
에스파냐가 장악한 고향으로 기어들어가기 보다 정복자로서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어.
그는 페르디난트처럼 싸우고 싶었지.
(그만둬, 이 자식아! -0-!)
결국 영국-에스파냐 계획은 프리드리히와 페르디난트 양측 모두에게서 반발을 받아 좌초하고 말았어.
다시 평화는 후퇴해 버렸지.
위풍당당 페르디난트:
사실 페르디난트는 라인 일대의 에스파냐군이
빚어낸 교착 상태에 기분이 좋지 않았어.
국제적 분규가 발상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막시밀리안과 협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제위를 위한 성전은 그에게 불쾌한 일이 아니었어.
전쟁이 고통스러운 건 알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상상력은 없었거든.
그보다 신교 병사들이 성모상의 눈알을 도려내는 것이 더 끔찍한 일로 여겼지.
게다가 프리드리히나 만스펠트와 달리
전쟁 지속의 책임을 그들에게 지울 수 있으니 정치적,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었어.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해
에스파냐의 견해보다 자신의 견해가 더 안전하며,
네덜란드나 프리드리히가 곧 영국-에스파냐 구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어.
페르디난트는 사태에 개입하고 언제 사태가 흘러가도록 놔둘지를 알고 있었어.
이것은 페르디난트의 특별한 재능이었어.
이래저래 1621년 겨울에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 또 실패하는 프리드리히
엘리자베스는 용감해:
무능하지만 용기?와 신념이 있는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스는 신교 유럽의 이해관계를 모았어.
(이들에겐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
만약 프리드리히 부부가 영국-에스파냐 계획을
받아들이고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갔다면 30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아직 20대였던 이 부부는 그럴 마음이 없었어.
무능하고, 남을 지나치게 믿고,
계속 패배해도 또다시 재기를 위해 병력을 모으고,
한 동맹자에게서 배신을 당하면 다른 동맹자를 찾는,
고집 세고 사리에 어둡고 고지식한 왕과 왕비는 신교 유럽의 이해관계를 독일로 끌어모았다.
9년간의 불행에도 그들의 명분은 살아 있었다.
리슐리외와 구스타프 아돌프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에스파냐 지배를 영구히 파괴하러 나설 때까지도 그들은 명분을 잃지 않았다.
p194
부부의 역할을 보면 프리드리히는 그냥 얼굴마담이고, 엘리자베스가 실세였어.
엘리자베스는 드러나지 않은 세력가들과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 프랑스의 조신들에게도 엄청난 분량의 서신을 보냈어.
화려한 미모로 대사들을 압도했고, 남편도 갖지 못한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은 주화를 만들었어.
(화려한 미모?;; 그건 프리드리히인 것 같은뒈.)
할버슈타트의 광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측에서 처음으로 확보한 중요한 동맹자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젊은 군주 크리스티안이었어.
그는 자진해서 그들에게 가담해 네덜란드의 자금으로 새 군대를 모집하고 지휘했어.
크리스티안은 열여덟 살 때 할버슈타트 세속 주교구의
'행정관'으로 발탁되었지만 카톨릭을 심하게 싫어한다는 점을 빼고는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
잘생긴 외모에 힘과 활기가 넘쳤던 그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며 버릇이 없었고
무책임하고 고집이 센 데다 군인 같은 태도와 거친 말투를 즐겨 구사했다.
기사로써 전쟁 영웅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실제로 그는 포로들을 배려하고 적에게도 예의를 지키는 인물이었다.
...
돈도 거의 없고 장교도 별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1621년 가을 1만 명의 병력을 모집했다.
비록 무기도 규율도 변변치 못했지만
이 수완은 적어도 그의 엄청난 활동력을 보여준다.
이 정도 인물이라면 단순한 약탈자보다는 더 나은 별명이 어울릴 듯 싶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를 '할버슈타트의 광인'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광기에는 영감이 깃들어 있었다.
p196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
그 무렵 또 다른 동맹자가 나타났지.
바덴-두를라흐 변경백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였어.
(또 게오르크야! 또 프리드리히야! 으어... -0-;)
그는 독실한 칼뱅파이자 순수한 독일인이었는데
라인 일대를 위협하는 에스파냐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어.
통치자로서 인기가 많았고, 예순인데도 활기가 넘쳤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거의 다 자신의 신민들로 1만 1천 명의 병력을 일으킬 수 있었지.
1622년 봄 프리드리히 :
이리하여 1622년 봄 프리드리히는
대의는 작지만 황제에게 맞설 수 있게 되었어.
알자스의 만스펠트,
베스트 팔렌의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바덴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이 세병력이 라인에 모이면 프리드리히는 약 4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는 셈이었어.
지휘만 잘한다면 틸리와 에스파냐 군대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규모였어.
하지만 당시 세 군대는 떨어져 있었어.
크리스티안은 베스트팔렌, 다른 두 군대는 라인 강 상류에 있었어.
또한 신교 군대의 재기에 겁을 먹은 이사벨 대공비가 만스펠트를 매수하러 사자를 보낼 시간도 넉넉했지.
(아아... 만스펠트... 폭탄 돌리기여, 뭐여;;)
한편, 프리드리히는 변장을 하고 헤이그를 떠나
1622년 4월 22일 팔츠령에 있는 게르메르스하임에서 만스펠트와 합류했어.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던 만스펠트는 늘 그렇듯 이사벨의 사자와 흥정을 벌이던 중이었지.
주군이 오자 그는 논의를 연기하고 병력 대부분을 거느리고 라인 강 우안으로 갔어.
거기서 틸리와 코르도바의 합류를 차단하고 4월 27일 밍골스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적에게 피해를 줬어.
하지만 그 동안 틸리는 만스펠트 군대를 피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5월 초 코르도바와 합류했지.
이제 프리드리히 동맹군의 문제는 어떻게 크리스티안과 합류하느냐가 문제였지.
만스펠트와 바덴 변경백의 병력만으로는 틸리와 에스파냐군을 상대하기 어려웠지.
무엇보다 급료가 없었어.
그 때 크리스티안은 막대한 전리품을 갖고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어.
...지난 몇 달 동안 뮌스터와 파더보른 같은 부유한 주교구를 협박해 적지 않은 돈과보석을 빼앗았다.
...
하지만 묘하게도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동은 매우 온건했다.
파더보른의 성당 참사회는
그의 태도에서 아무런 결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성당의 성물함을 녹여서 가져가면서도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성인들의 유골은 손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p198
빔펜 전투 :
1622년 5월.6일 바덴 변경백은 빔펜에서
강을 건너려다 틸리와 코르도바에 의해 자신의 본대와 차단되었어.
변경백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대포 장착.
변경백측이 에스파냐와 바이에른 연합군 기병을 공격하면서 대포로 지원 포격.
코르도바의 전위가 잘 준비된 포격으로 무너져 퇴각.
프리드리히 우측 기병대가 좌측 기병대 공격.
카톨릭군 기병대 패퇴.
스페인군 소속 테르시오 보병대들이 바덴군의 전투 마차 대형을 향해 진격.
그러던 중 카톨릭군 대포가 포탄이 실린 바덴군의 마차 명중 후 연쇄 폭발.
카톨릭 군은 구멍이 뚫린 전투 마차 방어선을 뚫고 적에게 진격.
바덴군 전체가 패주.
...그의 병사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코르도바의 병사들
머리 위로 떠다니고, 태어나면서부터 벙어리였던
코르도바의 한 병사가 "승리, 승리!"라고 외치며 동요하는 동료들을 고무했다.
여기서 전설이 탄생했다.
사실 흰 옷의 여인은 게오르크 프르드리히 측에서
마구 쏘아댄 무기에서 나온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 생겨난 형상이었다.
기회를 잡은 틸리와 코르도바는
즉각 언덕 위에 모여 공격에 나섰다.
바덴군은 치열하고 오랜 저항 끝에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p199
빔펜 전투(Battle of Wimpfen) |
|||
진영 | |||
제국군 (승리) 카톨릭 동맹 |
신교도 동맹 | ||
지휘관 | |||
틸리 백작 코르도바 장군 |
바덴 변경백 | ||
병력 | |||
15650+ 12파운드 포:7 하프캐넌 포:1 8파운드 포:5 |
12700 60파운드 포: 2 70파운드 포:1 3.5.6.8 혼합 포: 20 하프 캐논포: 6 |
||
전사 및 부상 | |||
1800명 | 3000명 |
게오르크는 병력의 2/3가 다시 모였지만
공포이 질린데다 자신의 신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자괴감에 전쟁을 계속할 의사가 없었어.
결국 그는 동맹자의 역할을 포기했지.
회흐스트 전투 :
이제 프리드리히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이 만나는 것이었어.
만스펠트와 틸리는 네카어 강 유역을 뒤로하고 마인을 향해 내달렸어.
틸리와 코르도바가 먼저 마인에 도착했고 그 때 크리스티안은 회흐스트의 교두보에 막 도착해 있었지.
크리스티안의 1만2천~5천 병력은 허술한 상태.
그의 과제는 최대한 많은 병력과 전리품을 가지고 마인 강을 건너는 것.
(그래서 전투라고 부르기도 쫌...)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2천 명 사망.
병사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까닭에 목적은 이룸.
회흐스트 전투(Battle of Höchst) |
|||
진영 | |||
제국군 (승리???) 카톨릭 동맹 |
팔츠(보헤미아) | ||
지휘관 | |||
틸리 브롱크호르스트 코르도바 |
광인 크리스티안 만스펠트 |
||
병력 | |||
26000 | 17000 | ||
전사 및 부상 | |||
100명 | 2000명 |
어쨌든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은 만났어.
만스펠트는 군대가 자신의 유일한 자산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크리스티안과 합동 작전은 피하고 싶었지.
며칠 뒤 만스펠트는 양측의 군대를 거느리고 라인을 거쳐 란다우로 퇴각하고 주장했어.
그것은 곧 적이 라인 강 우안을 무혈로 점령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는 뜻이었지.
아아... 이게 뭐야:
만스펠트의 군대가 퇴각하던 3주는 프리드리히에게 지긋지긋한 시간이었어.
만스펠트의 군대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고 학살하고
난리 부르스라 이게 왕의 마지막 남은 평판마저 갉아먹었거든.
만스펠트 역시 프리드리히를 위해 일하는데 진력이 났어.
1622년 7월 13일 만스펠트는 결국 자신과 크리스티안의 임무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어.
이제 군대도, 재산도, 하인도 거의 없는 프리드리히는
이모부인 부용 공작이 있는 스당으로 물러갈 수 밖에 없었어.
거기서 그는 목욕과 테니스로 소일하면서 새 동맹자를 찾았지.
(...아앜!! 제발 구마내!!!)
만스펠트는 다시 고용주를 찾기 위해,
크리스티안은 신교의 대의에 복무할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네덜란드로 향했어.
베르겐 오포 좀 전투:
1622년 여름 스피놀라는 국경을 넘어 중요한 요새인 베르겐오프좀을 포위했어.
명확한 초청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은 위기에 처한 그 도시로 곧장 진격했지.
(...오라녜 공이 만스펠트한테 도, 돈 준다고 했자너;;;)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은 베르됭 중립 주교구를 지나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로 진입.
에스파냐 장군들은 그 이동을 예상 못함.
코르도바는 소규모 병력으로 북상해 플뢰뤼스에서 차단 시도.
8월 29일 그곳에서 크리스티안과 만스펠트는
다섯차례의 필사적인 공격 끝에 마지막 다섯 번째에 이스파냐의 방어망을 뚫고 적군을 무찌름.
이 전투 후 크리스티안 오른 팔 절단.
그는 전투에서 오른팔을 다쳐 며칠 뒤 절단 수수을 받았는데,
그것조차 자신의 용맹과 용기를 과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나팔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술이 집행되었고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Altera restat(두 번째 삶)' 이라는 문구를 새긴 메달을 제작했다.
10월 4일 그는 만스펠트와 함께 때맞춰 도착해 베르겐오프좀의 포위를 풀었다.
p204
베르겐 공성전(Siege of Bergen op Zoom) |
|||
진영 | |||
네덜란드 연방 (승리) | 스페인 | ||
지휘관 | |||
모리스, 오렌지 만스펠트 크리스티안 |
스피놀라 헨드리크 반 덴 베르크 루이스 데 벨라스코 |
||
병력 | |||
? | ? | ||
전사 및 부상 | |||
? | ? |
그 동안 틸리와 코르도바는 팔츠령의 정복을 완료했어.
하이델베르크 수비대는 1622년 9월 19일 항복했지.
틸리는 휘하 병사들에게 관례적인 약탈을 허락하며 노고를 취하했지.
스당에서영국 왕과 덴만크 왕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도움은 없었어.
11월 5일 호러스 비어는 만하임을 버렸어.
이제 프리드리히에게 남은 것은 프랑켄탈의 작은 요새 하나 뿐이었어.
프리드리히가 저 꼴이 났으니 페르디난트는 이제 기다릴 필요가 없었어.
막시밀리안에게 한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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