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4~6) 에스파냐의 경보.독일의 경종 1619~21년

4. 에스파냐 견제

에스파냐 견제:

독일 내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에스파냐의 위협을 예견하고 있었어.

 

황제의 주요 자문관인 에겐베르크와 하르하 백작이 

에스파냐의 통제를 받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또한 에스파냐 대사인 오냐테와 상의하지 않고는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상식이었어.

 

그래서 안할트도 신교 연합으로 뭔가 되겠다 싶었겠지.

마음 한 구석엔 독일을 에스파냐의 제국주의로부터

지키겠다는 대의도 있었을 거야.

 

군주들은 스피놀라가 병력을 모으는 걸 알았지만 행동에 나서기는 두려워 했지.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바이에른 공작, 

이들은 각각 루터파, 칼뱅파, 카톨릭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체제의 수호자라고 선언했어.

 

그런데 이 수호자들은 체제가 위험해 처했다는 건 인식하지 못했을까?;;;


브란덴브루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칼뱅파

게오르크 빌헬름 / 위키피디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는 변명 거리가 있었지.

가문의 맏이였던 그는 칼뱅파 아버지를 계승했거든.

 

루터파인 어머니그를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라고 작센의 요한에게 헬프를 쳤지.

(루이 13세 엄마랑 친군가? -_-;;;)

 

젊은 선제후는 이웃의 폴란드 왕에게 손을 벌렸어.

그랬더니 어머니는 둘째딸을 폴란드 왕의 숙적인 스웨덴 왕과 결혼시켰지.

폴란드와 차단된 게오르크 빌헬름보헤미아인들을 지원해 그 대가로 도움을 얻고자 했어.

 

그러자 작센 선제후가 브란덴부르크를 침략해서

루터파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하겠다고 위협했어.

 

그렇게 게오르크 빌헬름이 요한 게오르크에 바짝 엎드리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어. -_-;;;

(으어! 빌헬름이도 너무 많고 게오르크도 너무 많아!)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

이제 나 알지? 나 여전히 좀 짜증나.

왕위에 못 올랐어도 신교도이고 합법적 지배자

그는 카톨릭의 폭정에 맞서 새 군주를 지지해야 했어.

사심도 좀 있는 양반이기는 했지만 독일의 자유를 존중하는 마음은 진심인 사람이었어.

 

그렇다면 프리드리히가 에스파냐와 플랑드르 군대에게 밟히는 걸 두고 보면 안 되지.

하지만 그는 프리드리히를 버렸어.

 

그는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신교와 입헌주의 세력에게 심각한 해를 입혔다고 봤어.

그러므로 그의 목적은 프리드리히의 대실수를 만회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프리드리히를 버린 거야.

 

뮐하우젠에서 프리드리히의 왕위 찬탈을 반대한 직후 그는 페르디난트와 조약을 맺어,

무장 개입의 대가로 보헤미아에서 루터교를 보장받고 작센 지역의 모든 세속 교회 영토를 승인받았어.

 

그는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일 신교의 무력을 이용해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의 합법적 군주로 복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보헤미아에서의 루터교 보장북독일의 세속화된 영토 승인은 요한의 입헌주의, 신교 정책의 근간이었어.

 

여기까지였으면 좋아겠지만 그는 한 술 더 떠 라우지츠를 작센에 넘기라고 했지.

이 이기적 조항은 완벽할 뻔 한 그의 입지에 흠을 냈어.

 

...불행하게도 요한 게오르크의 왕조에 대한 야심이 정치적 직감보다 강했던 거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이제 나도 알지? 막시밀리안이야

막시밀리안 역시 독일의 무력으로 페르디난트를

복위시켜 그와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했고, 프리드리히의 선제후령을 대가로 요구했어.

(-_-;; 이 도둑놈이!)

 

요한의 조약 내용을 들은 막시밀리안은 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결국 보헤미아 전쟁에서 그가 최고 지휘권을 맡고

요한은 슐레지엔과 라우지츠의 공략만 담당하기로 정해진 뒤에야 만족했대.


하지만 당장 이익에 혈안이 된 이 편파적인

애국자들은 공동의 정책을 취소해버렸다.

두 사람은 영토와 직함을 놓고 페르디난트와

협상하면 오히려 그에게 위기에 처한 독일 제국을

마음대로 분할하고 재분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두 사람은 페르디난트가 원하면 언제든 다시 에스파냐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그들에게 프리드리히의 라인 영토와 관련해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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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헤미아와 제국

프리드리히 비극의 시작:

나 프리드리히. 지금 쫌 힘드렁;;;

그의 무리가 교회를 모독했기 때문에 많은 신민들이 그를 몹시 미워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몰랐어. -_-;;;

신민들이 그를 왕으로 선출한 이유는 그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는데 그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

 

사재를 털어 병력을 증강하기도 하고

런던 처가까지 가서 빌리고, 보석을 저당 잡히고,

유대인 카톨릭을 윽박질러 돈을 염출했지만 자금은 계속, 계속 부족했어.

 

자금이 부족하니 군대의 질은 나빠졌지.

급료와 보급이 달리면 그냥 약탈 시작이지 뭐.

 

농민들도 여기저기서 법을 어기고 봉기를 일으켰고 모병 체계도 무너졌어.

자금도 자금이지만 지휘관도 모자랐거든.

 

군마, 병사, 대포, 돈... 다 부족한 상태의

에렌스트 폰 만스펠트는 여전히 프리드리히의 이름으로 플제니를 점령하고 있었어.

 

그는 급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라하로 갔지.

자금 부족으로 해산한 연대가 그를 추격하며

문제를 일으켜서 도시는 거의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귀족들은 무도회와 파티로 흥청거렸지.

 

대중 앞에서 소심해지는 성격에 낯선 언어, 익숙치 못한 예절외 기타 등등...

이런 환경 속에서 프리드리히는 평소만큼의 지성도 보여주지 못했어.

 

그가 한 실수는 버라이어티 했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교회를 모독한 것이었어.

예수회 교회의 성화들을 떼어내고 성물을 가져다 땔감으로 쓰기까지 했거든.

당연히 신민들은 뿔따구가 단단히 낫지.

 

그 부부가 처신이 개떡같기도 했지만 신민들이나 관리들도 그를 돕지 않았어.

 

여기까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리드리히는 돈이 없고 무능하며 아무것도 모른다.

인 것 같아...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틸리 백작/ 위키피디아

1620년 7월 23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휘하 장군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지휘하는 카톨릭 동맹 병력 2만5천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어.

(또 요한 머시기니까  기냥 틸리 백작이라구 하쟈;;)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용병들이

예수회 설교사들의 격려를 받으며 행군했지.

틸리 백작은 젊은 시절 예수회에 가입하려 했으나 

신을 위한 전쟁에 매진하기로 마음먹고 군인이 되었지.

도덕을 엄격히 지키며, 늘 수호성인에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갑옷을 입은 수사'라고 널리 알려졌대.

 

막시밀리안은 많은 신교 젠트리가 무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확실히 장악하려 했어.

틸리의 군대가 들아닥치자 농민들은 달아났고 8월 4일 린츠에서 오스트리아 상류층의 항복을 받아냈어.


팔츠가 떠나가네:

그 무렵 스피놀라는 2만5천명에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플랑드르를 출발했어.

 

대열의 선두가 라인 지역을 향해 진군해 오자,

네덜란드 연방의 오라녜공은 두렵고 능력도 없어서 영국 왕에게 도움을 호소했어.

이 때 영국의 제임스1세는 호러스비어가 이끄는 2천여명의 지원군 연대가 저지대 지방으로 출발하는 것을 허락했어.

 

진격하는 스피놀라;;

1620년 8월 셋째 주에 스피놀라는 라인으로 방향으로 돌렸고 8월 19일 마인츠를 점령했어.

9월 5일 스피놀라는 라인 강을 건넜고 10일에는 크로이츠나흐, 나흘 뒤에는 오펜하임을 손에 넣었어.

 

프리드리히는 이 상황에서 영국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의 어무니가 땅을 치고 개탄했다고;;;)

 

한편 틸리는 린츠에서 나머지 제국군과 합류해

보헤미아 국경을 넘었고 이후 작센 선제후가 내려오자 라우지츠의 수도 바우첸은 바로 항복했어.

 

그 무렵 막시밀리안은 플제니에 항복을 요구했고 만스펠트는 협상을 시작했어.

 

프리드리히에게 돈이 없었으므로 만스펠트야 적닥적당히 길을 열어줬지.

나중엔 막시밀리안에게 고용될지도 모르자너;;;

 

프라하로 향한 막시밀리안은 10월에 로키찬에서 프리드리히의 오합지졸 부대를 따라잡았어.

 

며칠 뒤 만스펠트가 군막으로 찾아와서 계약이 소멸되었다고 통지했어. 뚜둔~!

계약을 갱신할 돈이 없으니 탓할 것도 없지.

나 만스펠트, 돈 안 주면 꼼짝도 안 하지.

프리드리히는 헝가리를 다시 침략한 베틀렌 가보르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어.

그러나 보헤미아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그가

파견한 병력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어.

약탈을 일삼고 동맹군도 공격하고 지들끼리도 싸우며, 포로도 무참히 살해했어.

 

그러는 동안 주변의 시골은 황폐해졌고 양 진영은

습한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감기와 열병이 번져 상당수의 병력이 목숨을 잃었어.

 

11월 4일 보헤미아 왕의 대관 기념일에도 분위기는 심드렁했고 급료가 밀린 병사들도 폭동 직전이었어.


제국군:

막시밀리안과 제국군의 장군 부쿼이 백작도 똑같은 회의에 휩싸였어.

최고 지휘권을 맡을지를 놓고 알력이 빚어진 거야.

 

막시밀리안과 부쿼이 백작/ 위키미디어

기회주의적인 정치가 VS 요령 없는 군인 이랄까?

 

페르디난트의 해결책이 뭔지 알아?

군대의 유일한 총사령관은 자신의 운명을 주관하는 성모마리아라고 공식 선언했다네... -_-;;;

 

그리고 부쿼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의 의견에 따라 프라하를 바로 공략하기로 했어.

그는 수도를 점령하면 반란이 종식되리라고 믿었거든.

 

군인이 아닌 막시밀리안의 정치적 후각이 옳았어.


빌라호라(백산) 전투: 1620.11.8

1620년 11월 5일 보헤미아군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은밀하게 철수했고 제국군은 곧바로 추격했어.

 

7일 밤 왕은 수도로 들어가 의회에게

군대에 급료를 마련해달라고 간청했고 얼마 뒤 안할트는 빌라호라의 넓은 고지대로 군대를 이동시켰지.

안할트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고 그렇게 보고도 했어.

 

한편 규율이 무너진 베틀렌 가보르의 군대는 한창 시골을 약탈하는 중이었어.

그 약탈의 불빛은 그들의 위치를 노출시켰고 덕분에 막시밀리안과 부쿼이는 추격을 개시했지.

 

11월 8일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했어.

백산전투 지형과 배치 / 위키피디아

틸리 부대의 기습은 성공했고

투른의 기병대가 반짝 힘을 냈지만

훈련이 잘 안된 보병대 전열이 허공에 사격하는

실수로 엄청난 폭음과 연기가 발생하면서 공포로 도주.

 

안할트의 아들이 용감하게 중앙부로 돌격해 부쿼이의 기병대를 내쫓고 보병대까지 와해시킴.

 

하지만 틸리가 파펜하임이 이끄는 카톨릭 동맹군에게

안할트 아들 쪽으로 공격 명령을 하고 여기서 기병대는 무너지고 안할트 아들은 포로로 잡힘.

 

보헤미아 중앙부 장군 도주 후보헤미아군 전체가 무너졌고 후방의 베틀렌 부대도 잽싸게 도주.

빌라호라 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
진영
제국군 (승리)
카톨릭 동맹 
보헤미아 
지휘관
안할트 대공
투른 백작

부쿼이 백작
틸리 백작
막시밀리안
병력
보병 18500
기병 6500
보병 10000
기병 11000
전사 및 부상
650~1500명 2800~5,000명

 


버림받은 왕:

프라하에 있었던 프리드리히 부부는 영국 대사 두 명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었어.

전 날 전투가 없을 거라는 보고를 들었잖아.

그는 듣는대로 믿는 사람이니까 -_-;;;

 

성문 앞에 안할트가 그지꼴을 한 채로 온 것을 보고서야 패배했다는 걸 알았지.

이제 안할트가 가진 해결책은 도망뿐이었어.

 

프리드리히 부부는 버텨 보려고도 했지만 사실... 시민들이 먼저 그들을 버렸어.

시민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경멸하고 관습을 무시한 외국인 왕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렸어.

 

프리드리히는 급히 슐레지엔의 브로추아프로 떠났어.

 

군중은 이미 그를 희생시키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탈출이 불발로 끝날 뻔했다네. 

 

브로추아프에서 프리드리히는 권토중래를 꿈꿨어.

그는 슐레지엔 의회와 신교연합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돈만 구하면 군대는 고용하면 되니까.

 

프리드리히는 침략자인 작센 선제후와 협상해보고, 다음에는 모라비아에서 저항을 조직할 참이었어.

그러나 12월 20일 모라비아마저 항복했지.

 

결국 그는 곁에 남았던 중신들을 해산시키고 브란덴부르크로 빠져나갔어.

슐레지엔은 정복자들의 처분에 맡긴 셈이었지.

 

신민들과 친구들은 그 도망자를 버렸어.

 

안할트는 스웨덴으로 달아나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그 동안 잘못된 주군을 섬겼다면서 용서를 구했어. 

(...그래도 넌 그러면 안 되지 -_-;;;)

 

정복자들은 피정복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지.

전투 후 일주일 동안 도시의 성문이 닫혔고, 병사들은 무슨 일이든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어.

 

이 일주일... 철저하게 약탈 당했겠지.

 

한편 막시밀리안은 이번 전쟁을 치러낼 능력을 가진 독일의 유일한 군주였어.

그가 이끌고 나왔던 군대 비용으로

황제는 이미 그에게 300만 굴덴의 빚을 지고

결국 그에게 담보로 오버외스터라이히를 내주었어.


빈에서 황제 페르디난트는 모자를 쓰지 않은 채로

말을 타고 가서 성모 마리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러고는 1천 플로린을 들여 순은제 왕관을 제작한 뒤

자신이 직접 그 왕관을 슈타이어마르크의 마리아첼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물함에 안치했다.

그보다 더 화려한 왕관은 로마의

산타마리아델라스칼라 교회로 보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선물은

하늘에 감사를 표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몰라도

에스파냐와 바이에른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p172



6. 보헤미아와 제국

백산 전투 후:

황제가 프리드리히를 팔츠에서 쫓아내는 것도

그 권리를 막시밀리안한테 주는 것도 위법적 행동이었으니 신교 연합에서는 반발했지.

 

보헤미아의 저항은 빌라호라 전투에서 무너졌어.

신교 세력은 보헤미아를 구하러 오지 않았지.

 

이제 프리드리히는 용서를 구해야 했고,

에스파냐는 팔츠령에서 물러나야 했어.

또한 만스펠트는 군대를 해산해야 했고,

페르디난트는 빛을 갚아야 했지.

하지만 이 네가지 자명한 가정은 실현될 수 없었어.


프리드리히:

브란덴부르크로 피신한 프리드리히 부부는

여전히 낙천적이었고 여전히 엄청 사치스러웠어.

(세 살난 딸에게 거금을 들여 진주도 사줬다고...)

 

프리드리히가 양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권력을 잃자 원래대로 돌아간 것 뿐이야.

낙천적이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인 일관성 말야.

 

그는 패배했지만 자신의 명분은 버리지 않았어.

보헤미아를 구하기 위한 용기와 리더십도 없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구하는 데 필요한 이기심도 없었어.

 

패배는 옳고 그름을 단순화시켰지.

이제 옳은 것은 단 한가지,

종파와 반역에 개의치 않고 패배한 명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어.


투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확언했다.

"우리는 탐욕이나 야망 때문에 보헤미아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곤이나 고통 때문에 우리의 친애하는

신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며, 명예와 양심을 저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빌라호라 전투 이후 그는 죽는 날까지 늘 그 양심에 따르며 고결한 신념과 비참한 결과를 감수했다.

p173



프리드리히의 용서와 에스파냐:

황제는는 공식적인 항복과 사과를 요구했지만

프리드리히는 특유의 소박함으로 정의로운 사람은 사과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지.

내가 몰 잘못함? 사과 노노, 항복 노노!

만약 황제가 보헤미아의 체제를 보장하고,

징집된 군대의 급료를 지급하고, 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면 그는 양위를 진지하게 고려했을 거야.

 

프리드리히는 죽을 때까지도 확고하게

자신이 제국의 평화를 침해하지 않았으며,

황제에게 반역한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반기를 든 것뿐이라고 주장했어.

 

프리드리히가 끝내 항복하지 않는다면 스피놀라의 군대는 팔츠령에 계속 머물 거야.

 

언급한 가정 중 두가지는 벌써 나가리가 됐어.


만스펠트의 군대 해산: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일자리를 잃은 군대와 함께 플제니에 진을 쳤어.

 

그는 황제에게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30만 탈러의

비용도 부담해야했고 새 고용주도 찾아야 했어.

그 당시 군대는 딸린 식구들이 많아 거의 국가였대.

식구들 거둬 먹이느라 내가 허리가 휜다구...

겨울을 나는 동안 만스펠트는 사보이, 베네치아,

네덜란드 연방에 모두 고용을 타진하면서 유럽 정치를 혼동에 빠뜨렸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약탈도 병행했지.

 

얼마 뒤 네덜란드에서 프리드리히를 지원하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패배한 군주와 계약을 연장했어. 

 

땅은 없고 빚만 잔뜩 짊어지고 있던 만스펠트

조건 없는 사면과 함께 넉넉한 자금과 작지만 독립적인 공국을 원했어.

독일 심장부에서 전쟁을 계속하면 가능할지도?

 

이리하여 평화로 향하는 세번 째 문도 닫혔어.


막시밀리안의 채무:

그는 이미 오버외스터라이히를 점령한 상태였어.

황제가 전쟁 비용을 갚으면 그곳을 반환해야 했지만

1621년 초에는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았어.

 

더 심각한 문제는 페르디난트가 프리드리히의 선제후 직함을 승자에게 주기로 약속한 거야.

 

뮐하우젠에에서도 이 문제에는 다들 냉담했어.

막시밀리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일 군주들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는 동의해도

그의 영토와 직함을 박탈하는 것도, 제국에서 추방하는 것도 반대했어.

 

프리드리히를 폐위하기 위해서는 군주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처리하려고 했지.

 

먼저 프리드리히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그 추이를 지켜보면서 팔츠 선제후 지위를 막시밀리언에게 양도할 요량이었어.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간에 그 두가지 조차 결국 그의 권력과 권위로 집행되어야 했지.

사실상 그것은 황제와 법 사이의 힘겨루기였어.

신이 준 권한으로 황제 된 건데 우쒸... 돈도 엄꾸 맘대로 할 수 있는 거뚜 엄꾸!!

 


막시밀리안과의 협정에 묶여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탓에

페르디난트는 많은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협정을 구실로 삼아 막시밀리안의 야심을 자신의 야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토지 재분배를 통해

제국의 힘을 증강시키기로 했다.

막시밀리안이 그 기회를 준 것이었다.

p178



마인츠 협정:

1621년 1월 29일 프리드리히는 추방령 통보! 

 

그 추방령은 명백히 위법이었기 때문에 8일 뒤에 신교 연합이 하일브론에 모였어.

출동하라, 법의 수호자들!!

 

그들은 먼저 빈에 대해 무장 항의를 시작했어.

하지만 황제는 추방령 취소를 거부하고 무장 병력을 해산하라고 명령했어.

 

동시에 라인에 있던 스피놀라의 군대가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했지.

물론 이건 당연히 뻥카였어.

곧 네덜란드와 휴전이 끝나는 시점이었거든.

브뤼셀 정부는 스피놀라에게 무조건 신교연합과 휴전하고 즉각 네덜란드로 돌아오라고 했어.

 

신교연합의 도시들은 법을 따지다가 에스파냐 군대의 공격을 받을 수 없다며 스스로 물러섰어. 

(이, 이봐들 그래도 이렇게 바로...-_-;;;)

 

4월 1일 스피놀라와 마인츠 협정이 맺어졌어.

그가 신교들의 중립을 보장하면 해산하겠다는 조약으로 신교 연합이 서명한 마지막 공문이었대.

이 멤버로 다신 안 모였다는 얘기지;;

 

싸움 한 번 없이 법치의 수호자들

자신들의 지도자와 원칙을 포기했으며,

독일 땅에서 독일의 자유를 위한 싸움을 외국인들과 야심가들에게 넘겼어.

 

신교 군주들프리드리히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고자했고 카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외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했어.


덴마크, 네덜란드.프랑스. 영국:

유럽은 프리드리히나 보헤미아에는 노관심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를 두려워하거나 라인 유역을 탐내는 군주들은 많았어.

 

프라하가 몰락하자 모든 시선은 팔츠령에 있는 황제의 에스파냐 동맹 세력에게로 향했어.

 

덴마크 왕보헤미아에서 신교의 저항이 무너진다면

합스부르크가 엘베 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북쪽 발트 해까지 영토를 확장하려 들 거라고 우려했어.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정부는 모두들 하나같이

보헤미아 전쟁의 암운 아래 에스파냐인들이 팔츠령을 점령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데 당황했지.

 

영국은 뒤늦게 네덜란드 연방을 지원했지만 에스파냐를 항구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어.

이제와 울름 조약을 맺었다고 프랑스를 엄청 비난했지.

 

한편 그 전해에 카톨릭 봉기로 발텔리나 고갯길이 열리면서 독일로 오는 에스파냐의 보급로도 열렸잖아.

 

당장 심각하게 위험한 건 네덜란드 연방이었어.

불안에 떨던 오라녜 공 마우리츠는 브뤼셀 정부와

불리한 평화조약이라도 맺으려 했지만 브뤼셀 정부가 그걸 왜 해주겠어.

 

네덜란드의 대안은 국경을 방어하면서 프리드리히와

동맹 세력이 라인 일대를 탈환하도록 지원하는 거였어.

 

네덜란드는 서둘러 덴마크 왕과 조약을 맺고

만스펠트에게 신교 대의에 충성할 경우 후히 보상하겠다고 약속했어.

아싸아~ 입금 소식이다앗!

1621년 4월 9일 에스파냐와의 휴전 기간이 종료!!

닷새 뒤 프리드리히는 헤이그에 도착해 환영을 받았어.

(-_-; 이러니 자꾸 못말리게 낙천적이지)

 

4월 27일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라인 영토 탈환을

위해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했어.

 

이리하여 독일 비극에 제2막이 시작되었어.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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