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단편이지만 각각 호흡이 느린편으로 전체적으로 쌉쌀한 차 맛 처럼 담담한 느낌이야.
하지만 단편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징이 잘 살아 있고
반전으로 가는 빌드업도 좋은데다가 단편끼리의 순서도 유기적인 편이야.
(당연하겠지만 모든 단편이 다 마음에 들 순 없지ㅎ)
하지만 역시 호흡이 느린 편이라 처음엔 책장이 막 슉슉 넘어가진 않았었어.
인도 출신의 미국인들이 주인공이지만
소재 자체는 굉장히 친밀해서 읽고 나면 나중에 일상에서 자꾸 생각나.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조금 슬프기도 하지.
총 9개의 단편 수록 되어 있고
이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내용
일시적인 문제
한 동네에서 삼년 이상 살고 있는 쇼바와 슈쿠마.
박사 논문 준비중인 남편 슈쿠마와
그런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쇼바는
6개월 전 아이를 사산한 이후 더욱 데면데면해진 사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 던 어느 날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저녁마다
전기 공사를 하게 되면서 일주일간 단전이 된다.
촛불 하나를 앞에 두고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된 부부는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면서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며 가까워지기도 하는데...
가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때가 있어.
우리라는 건 너무나 가까운 사이를 말하지.
가족이나 아주 친한 친구나 뭐 등등...
상대가 나를 상처줄 때
나 역시 그 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에게 줘야만 끝나는 어떤 일들.
나의 상처를 툭툭 건드리는 엄마에게
그녀의 더 큰 상처를 후벼파거나,
힘들게 헤어짐을 고하는 순간 절대로 열어 보고 싶지 않은 상대의 허물을 뱉어낸다든가
우리는 알아.
내가 이 얘기로 상대를 후벼파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상대가 더욱 아프게 하고 나락을 떨어뜨린다고
내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그러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게 있어.
아무도 몰래 혼자서 겨우 봉합하던 상처가 터지면...
그 때는 정말이지 나도 몰라 하는 기분이 돼.
그러니까 내가, 또는 우리가.
모두 너무 많이 아프지는 않기를.
상처가 생기면 아프더라도 꼭 치료가 되기를.
부디 그 안에서 영원토록 썩어가지는 않기를.
기어코 터지고야 만다면
그래도 결국에는 아물 수 있기를...
질병 통역사
인도계 미국인 부부 다스 씨는 아이 셋과 함께
인도 여행을 계획하게 되는데 여행 가이드 겸 택시 기사인 카파시가 이들과 함께 한다.
인도인의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인도에서 나고 자란 카파시씨에게는 그저 이방인일 뿐인 다스 씨네 가족들.
산만하고 사진 찍는 데 정신 없는
이상하리만큼 긍정적인 다스와 매사 뚱하기만 한 다스 부인.
여러개의 토속어로 이루어진 인도에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 말을 통역하는 일도 하는 마흔 여섯의 카파시.
다스 부인은 이 때부터 카파시 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젊고 매혹적인 부인의 관심이
지루하게 하강하는 일상을 가지고 있는 중년의 카파시를 자극하게 된다.
결국에 가족들과 조금 떨어져 카파시와 다스 부인은 둘만 남아 은밀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가끔은 먼다 스스로에게
'어째서 용서까지 받으려고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입 밖으로 담아내면서 내 죄를 가볍게 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
그럴 때 내 스스로에게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
너, 이런 일을 한 주제에 용서까지 바라는 거야? 하고.
우리가 절대 하면 안돼 라고 생각하는 여러가지 일들은
막상 저지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범죄라면 물론 벌을 받겠지만)
사실 그래서 더 겁이 나는 걸 지도 몰라.
어떤 짓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그저 나라는 사람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져서 아주 묽고 희미한 사람이 될 뿐.
하지만 우리는 이런 용서를 구할 때 조차 간사해지지.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먼 누군가에게아주 슬쩍 다가가서 속삭이는 거야.
'나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그 때는 용서를 안 해줘도 그만이야.
그 낯선 이와는 다시 안 만나면 그만이거든.
그리해서 나의 죄라는 건 용서를 받거나 말거나
한 번 벌어진 일은 되돌이킬 수 없고 삶은 앞으로도 계속 되지.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한 없이 질책하고 허우적거리만 할 수도 없잖아.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되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절뚝거리면서 그냥 가는 수 밖에.
죄 많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그냥 모두 함께 절뚝, 절뚝 거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용서까지는 못 해도...
괜찮아. 그게 무엇이든 살아갈 수 없을만큼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하고.
축복 받은 집
흰두교도인 산지브와 트윙클은 신혼 부부.
새로운 보금 자리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집에서 자꾸 기독교 성물이 발견된다.
전 주인들이 남겨 놓고 간
물건들을 보물 찾기처럼 즐거워하는 트윙클과그런 물건이 꼴도 보기 싫은 산지브.
저 망할 놈의 물건을 치우려는 산지브와
자기가 찾은 보물을 빼앗기기 싫은 트윙클.
과연 주도권은 누가 갖게 될 것인가!
정말이지 한참 웃어버렸어.
나라 불문 인종 불문 이런 문제는 다 비슷한 가봐.
이런 거 있잖아.
양말 좀 뒤집어서 벗어놓지 마!
동네 마트 갈 때는 대충 좀 입고 나가자.
뭘 그렇게 오래 걸려.
제발 쓸 때 없는 물건 좀 주워 오지 마!
등등...
대체 사랑이라는 게, 삶을 함께 하는 게 뭘까?
대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기에
나와 이렇게 다른 너와 어떻게든 맞춰서 살아가려고 이렇게 아둥바둥 하는 걸까?
그리고 대체 그게 뭐 그리 어려운 것이기에
이다지도 내 마음대로 맞춰지지가 않는 걸까?
아마 영원히 한 몸, 한 마음 같은 사람이라는 건 없겠지.
그래도 이렇게나 다른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너와 내가 한 공간에서 상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아도 숨쉴 수 있도록.
나와 이렇게나 다른 너를 사랑할 수 있기를.
또한 너도 그러하기를.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나는 1964년 인도를 떠나
영국으로 간 뒤 1969년 미국에 일자리가 정해졌다.
부모님들의 추천으로
인도의 여성과 연애 없이 결혼했고
그녀가 오기 전까지 신혼집을 얻지 않고 하숙을 하게 된다.
하숙집 주인 할머니는 100살이 다된 분이셨는데
"달에 깃발을 꽂았다네! 젊은이!" 라고 하면
"굉장해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
할머니는 오래 전 과부가 되었지만
혼자서 씩씩하게 아이들을 키워냈고 그 나이에서도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 살아가는 사람.
시간이 지나 아내가 미국에 도착하지만
연애 기간도 없었던 아내와는 정이 없고
인도에서 영국 영국에서 미국으로 부유하며 사는 나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을 살아냈다.
그 언젠가 100년이 넘게 살아갔던 그 할머니처럼.
우린 굉장했어.
축복 받은 집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대체로 우울하고 암울한 이야기들을 쫙 깔아놓고 마지막에 나오는 대단히 따뜻한 내용이야.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부유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
억압되어 있던 10대를 지나
방황하던 20대가 지나고 나면,
뭐 대단한 걸 이루지도 못한 것 같고 앞으로도 뭐 대단한 게 될 것 같지도 않고.
평범하다 못해 비루한 나의 사랑과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와 똑같은 내일이 있는 돈 벌이.
나는 이제 어른이 됐는데 아직도 미래는 불안하고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리저리 많이도 비틀거리면서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굉장해!"
첫 번째 대륙이자 마지막 대륙에서 살게 되더라도.
30년까지 버티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모두 "굉장해!"
먼다의 추천
이 책은 어때?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SF 단편선
버틀러가 SF장르에서는 보기 드문
흑인 여성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단편의 이야기 감성이 어쩐지 서로를 생각 나게 했어.
이 영화는 어때?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일시적인 문제를 보고 생각난 영화야!
두 사람 사이의 갈등에 대한
원이과 과정을 보면 함께 봐도 좋을 것 같아.
*모든 책의 낭독 분량은 10페이지를 넘기지 않습니다.
-BGM 출처
title : Many Days(매니 데이즈) authr : 김재영
by site : 공유마당 저작권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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