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1~3) 뤼첸에서 뇌르틀링겐까지 그리고 그 이후 1632~35년
- 역사/30년 전쟁
- 2022. 7. 26.
1. 전쟁과 평화
멈춰야 할 자들과 멈출 수 없는 자들: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다시 한 번 독일에
평화를 희망하는 불꽃이 일었으나 가차 없이 짓밟혔어.
바야흐로 전쟁이 14~5년째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어떤 식의 평화라도 환영하는 분위기였지.
그러나 전쟁을 종식시킬만한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렸어.
제국 내에서는 황제와 작센의 요한,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크 빌헬름, 발렌슈타인이 평화를 강력히 원했어.
브란덴부르크는 세습 영토인 포메른을 스웨덴한테 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고발렌슈타인인 이제 병들고 지쳐서 전쟁에 투자한 대가를 받아서 은퇴하고 싶었지.
제국 바깥의 세 지배자 이사벨 대공비, 오라녜공, 교황은 화해를 원했지.
교황 오르바누스 8세는 카톨릭교도들에게서
명성을 잃은 채 온갖 비방은 물론 성직자들의 분노의 발광을 받아내야 했어.
그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별 수 없이 독일에서 합스부르크의 명분을 마지못해 지지했지.
전쟁의 지속을 원하는 사람들은 리슐리외, 옥센셰르나, 올리바레스였지.
리슐리외는 라인 일대를 장악려면 전쟁이 필요했어.
옥센셰르나는 지금까지 값비싼 희생을 치렀으므로
철군의 대가로 포메른을 얻기 전에는 스웨덴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곳을 차지하려면 다른 지역을 정복해 브란덴브루크에게 손실을 보존해줘야 했어.
올리바레스는 스웨덴 왕의 죽음으로
합스부르크가 다시 독일에 진출하고, 네덜란드를 공략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봤어.
옥센셰르나와 리슐리외는 신교 독일과 유럽에서 강화 조약을 폐기하려 했어.
올리바레스는 브뤼셀의 이사벨과 빈의 페르디난트를 누르고 마드리드가 재정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지.
이래저래 평화를 바라는 독일의 염원은 이 세사람의 정치적 야망에 완전히 볼모로 잡혔어.
2. 프랑스와 스웨덴
프랑스의 리슐리외:
1631년 2월 에스파냐의 마리아 안나 공주와
헝가리 왕 페르디난트3세가 결혼한 이후 마드리드와 빈은 다시 협력관계로 돌아섰어.
따라서 리슐리외는 제국과 저지대 지방에서 모두 강화를 저지해야 했지.
리슐리외의 대외 정책은 늘 에스파냐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막는데 주력했다.
스웨덴의 옥센셰르나: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리슐리외와 이해를 같이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완전히 서로 정반대였어.
구스타프는 1632년 11월 9일 마지막 편지에서
프랑스 왕이 독일 어느 곳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
그가 걱정대로 뤼첸 전투 이후 리슐리외는
신교 연합의구성원들을 이간질하면서 물밑에서 이런 저런 제안을 했지.
(원래부터 비밀 조약 좋아했자너 -_-;;)
악셀 옥센셰르나는 처지가 불확실했어.
어린 여왕과 태후의 국정 운영이 불안했기 때문이야.
그는 왕의 죽음을 접한 뒤 바로 작센으로 갔어.
발렌슈타인과 요한이 금방이라도 강화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야.
또한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4세가 평화를 중재하고 나선 것도 부담이었지.
그가 무엇보다도 막아야 할 것이 있다면,
시기심 많은 덴마크 왕이 주도하는 강화였어.
옥센셰르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그의 아들과 크리스티나 여왕의 결혼을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재차 확인해서 안심시킨 뒤 작센의 문제에 집중했어.
요한은 개별적이든 전반적이든 강화만 이루면 됐지만 아르님은 전반적 강화를 원했어.
그들은 일체의 항의를 무시하고 발렌슈타인과 협상하기로 작정했지.
(이거슨... 완전 예상 가능한 결과임 -ㅛ-)
신교 동맹은 거의 와해되었어.
요한과 옥센셰르나는 신교 세력의 지도권을 놓고 씨름을 벌였지.
하일브론 회의:
1633년 3월 18일 옥센셰르나는 하일브론에서 드디어 4개 지구의 회의를 열었어.
5주일이 지난 뒤 4개 지구는 스웨덴과 조약을 맺고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해 옥센셰르나의 지휘에 따라 제국의 신교대의를 수호하기로 했지.
제국의 자유기사들과 조약을 맺었고 다른 하나는 팔츠-침메른의 루트비히 필리프와 맺었어.
그는 폐위된 프리드리히의 동생이었으며
아버지의 채무를 물려받은 열여섯 살의 팔츠 선제후 카를1세 루트비히의 섭정이었지.
이 조약으로 옥센셰르나는 구스타프의 계승자로 널리 인정 됐어.
요한은 회의의 가치를 훼손시키려 불참했어.
하지만 그의 불참은 회의를 훼손하기는 커녕 옥센셰르나가 전쟁의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지.
프랑스 대사와의 협의는 매끄럽지 못했어.
* 푀키에르 =리슐리외가 파견한 프랑스 대사
프랑스는 스웨덴보다 돈이 많았으므로 푀키에르가 유리했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의 피와 돈에 대한 보상과, 독일 신교도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어.
푀키에르는 에스파냐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고, 독일 카톨릭을 보호하려 했지.
둘 다 독일에 대해서는 잔인했으나 어차피 둘 다 독일인은 아니었어.
파리는 또 한 번 판단을 잘못했는데 구스타프가 죽은 뒤 요한이 상황을 장악했다고 본 거야.
그러나 푀키에르나는 옥센셰르나를 보자마자
힘의 중심은 스웨덴이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그는 추기경의 지시를 거부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지.
하일브론 회의에서 푀키에르는 대표들에게
프랑스 왕을 스웨덴 정부와 함께 보호자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어.
동등한 위치라도 자원을 가진 프랑스가 스웨덴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게 뻔했으니 옥센셰르나는 거부하려고 했어.
그러자 푀키에르는 매년 스웨덴에게 지원하던 자금을 중단하겠다고 했지.
그 돈을 포기할 처지가 되지 못했던 옥센셰르나는 동맹을 받아들일 수 밖에.
결국 중개인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어.
그가 푀키에르보다 더큰 이득을 얻은 것은 막시밀리안에 관한 사안뿐이었어.
프랑스 정부는 줄기차게 막시밀리안의 중립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지.
우직한 아르님 장군:
하일브론 동맹의 결성은 요한의 전반적 평화 계획이 사실상 무산되었음을 의미했어.
드레스덴의 좌절과 고통은 끝이 없었지.
무엇보다 아르님의 희망이 완전히 꺾였어.
그리고 그 때 발렌슈타인이 그에게 제안했지.
작센군과 제국군을 합치자고 말이야.
둘이서 함께 6년 전 덴마크를 몰아냈듯 스웨덴군을 독일에서 몰아내자면서.
사실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독일의 평화를 가져오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거야.
그러나 아르님의 특징인 완고하고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이성보다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거든.
엄격하고 비극적인 명예의식, 타협을 모르는 신실함,
독일인의 장점이자 파멸을 초래한 그 요인이 그에게 조국을 구할 수도 있는 방책을 외면하게 했어.
또 다른 균열이 신교 세력의 틈으로 파고 들었어.
작센의 요한과 그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 사이의 균열이었지.
요한은 언제든 옥센셰르나를 버리고 황제와 자체적으로 강화하려 했으나 아르님은 그렇지 않았지.
권력을 갖고 있는 한 그는 오로지 전반적인 평화만을 추구했어.
신교 독일의 안녕은 하일브론 동맹으로
옥센셰르나와 리슐리외의 이해관계 완전 묶여 버렸어.
또한 합스부르크나 부르봉 어느 한 측이 상대를 박살내기 전까지 제국 내에 전반적 평화란 있을 수 없었지.
3. 다시 네덜란드
브뤼셀:
그 사이 네덜란드에서는 리슐리외와 올리바레스가 양쪽에서 평화에 대한 모든 희망을 짓밟았어.
1632년에 오라녜 공 프리데리크 헨드리크는
파죽지세로 벤로, 루르몬트, 마에스트리히트의 가장 큰 요새를 점령했어.
네덜란드 연방과 리슐리외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둘로 쪼개 프랑스가 남부를 병합하고, 네덜란드 연방이 북부를 차지한다는 비밀 협정을 맺었어.
(그 놈의 비밀협정은 -_-;;;)
그러나 프레데리크는 합스부르크 권력이 와해되고
부르봉 세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연방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지대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어.
브뤼셀 정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네덜란드 연방은
프랑스의 공격에 맞서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물밑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던 거야.
오라녜 공이 쳐들어오자 플랑드르 귀족들 중
반란 세력이 지원에 나섰으니 연로한 이사벨도 브뤼셀 상황을 알아챌 수 밖에 없었지.
1632년 9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의회는 평화를 향한 외침으로 시끄러웠어.
군대의 급료가 체불되고, 조세가 증대하고,
전쟁과 연방과의 경쟁구도로 항구와도시마다 무역이 쇠퇴하고 있어 정전을 애걸했어.
이사벨은 마드리드의 동의를 얻어 이 요구를 수락했지.
이리하여 휴전이 성립되었고 연방과의 강화 조건을 논의했다.
그러나 11월 말 두 가지 소식이 휴전을 방해했지.
하나는 뤼첸에서 구스타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고
또 하나는 에스파냐의 왕의 동생이 대공비의 후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어.
젊은 페르난도가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브뤼셀에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과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어.
또한 스웨덴 왕의 죽음은 황제가 다시 지원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지.
그런 상황에서도 노회한 대공비와 프레데리크는
평화를 원했지만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적대는 그들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갔지.
결국 휴전은 성사되지 못했어.
페르난도:
(페르난도를 독일식으로 읽으면 페르디난트자너.
황제 페르디난트, 아들 페르디난트, 네덜란드 총독 페르디난트...-_-;; 구마내!!!)
펠리페4세의 동생 추기경 왕자 페르난도는 이십대 초반에 올리바레스의 눈에 드는 방법을 깨우쳤어.
유년기 때 이미 교회에 헌신할 인물로
낙점되었던 소년은 구손을 싫어했으며 쾌락과 야망을 둘 다 놓치려 하지 않았어.
총명한 그는 성직에 있으면서 받게 될 형의 통제를 교묘하게 벗어났어.
그는 전쟁 기술을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네덜란드에 갈 작정이었지
합스부르크 왕조를 부활시킬 계획의 다른 중심인물은
페르난도의 친척이자 황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이었어.
(이 페르디난트가 니 페르디난트냐? -_-;;;)
페르디난트 대공의 지지 세력은 빈에서 에스파냐 대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어.
그들의 주요 목적은 페르난도에게 협력할 군대를 모집하는 거였어.
시들시들 발렌슈타인:
1633년 발렌슈타인이 없는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발렌슈타인의 자원이 모습을 드러냈어.
발렌슈타인은 빈에서 누렸던 모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1631년 행동으로 상실했어.
그는 틸리를 굶주림에 몰아넣었고,
메클렌부르크를 스웨덴에 팔아넘기고,
구스타프와 요한, 투른과도 파렴치한 협상을 벌였어.
절실한 필요성 때문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으나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 1632~33년 제국의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켰어.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지.
황제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렌슈타인을 신뢰하는 척 했어.
그는 여전히 군대가 있었고 자원이 있었으므로.
이 때부터 발렌슈타인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빈과 마드리드 모두 발렌슈타인이 방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확실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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